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강화해협
강처럼 보이지만 바닷물이라 ‘염수’
병자호란 함락 교훈 13개 진·보 설치
연안에는 총포 발사 48개 돈대 마련
군사 지휘소인 광성보 격전의 중심지
병인·신미양요 아픈 역사 오롯이 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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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김포평야를 가르는 강화해협은 ‘염수(鹽水)’라고도 불렀다. 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닷물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이해한다. 그만큼 구분하기 어려운 모양새였다. 해협 중간에 있는 광성보(廣城堡)는 조선시대 외적 침입에 대비해 구축한 조선 후기의 수군 진지였다. 조선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가 함락된 역사적 경험을 교훈 삼아 섬의 방비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효종~숙종 연간에 단계적으로 강화 연안을 따라 13개의 진(鎭)과 보(保)를 다른 지역에서 옮겨 오거나 새로 설치했다. 숙종 때인 1679년 강화 연안에는 포와 총을 발사할 수 있는 돈대가 48개 마련됐다.
군사 지휘소였던 광성보에는 종9품 별장의 지휘 아래 군관 15인, 토졸 45인이 배속됐고, 군선 9척이 비치됐다. 광성보에 앞서 강화해협 남쪽 초입에는 초지진이 설치됐다. 효종 7년이던 1656년 최전방 개념으로 만들었다. 4233㎡ 면적에 돈(墩·포대)들을 배치하고, 돈마다 포좌 3곳과 총좌 100여 곳을 뒀다. 처음엔 만호였다가 영조 39년 첨사로 승격했다. 이곳엔 군관 11명, 돈군 18명, 목자 210명에 전선 3척을 뒀다(『신증동국여지승람』).
1866년과 1871년 두 차례에 걸쳐 양요가 발생하자 광성보는 격전의 중심에 섰다. 양요는 ‘양이(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와 소란을 피웠다’는 뜻으로 천주교에 대한 대원군의 박해와 수교 요구 거부 등이 야기한 전쟁이었다. 대원군은 처음 천주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청나라가 1860년 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패한 후 천주교를 탄압하자 종주국을 좇아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인 신부들을 처벌한 병인년(1866년) 2월의 박해 사건으로 그해 9월 중국에 있던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도로 쳐들어와 조선군과 교전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프랑스군은 요코하마에 주둔하던 해병까지 투입해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강 수로를 봉쇄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포수 500여 명을 투입한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치자 두 달여 만에 청나라로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까지 올라왔다가 떠나면서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돼 있던 수천 권의 책을 불태운 후 문예지 은궤, 임금의 도장 어새, 조선의 지도 등과 함께 외규장각 도서 340여 권의 책을 탈취해 갔다(『고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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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7월에는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들어와 통상교섭을 요구했다. 셔먼호는 거절당하자 민간인을 약탈하고 나섰다. 이에 평안관찰사 박규수가 관민을 지휘해 상선을 불태워버렸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던 미국 아시아 함대(Asiatic Fleet) 소속 전함 5척이 강화도로 들어와 1871년 6월 초 조선 측과 교전했다(『근대한미교섭사』).
5월 하순 아산만 풍도 앞에 정박하고 있는 미군 기함 콜로라도(Colorado)호를 찾아온 남양부사 신철구가 한자로 목적을 물었으나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프레더릭 로와 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 제독은 이튿날 신철구에게 영어 편지를 보내 ‘고관과 상의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조선정부는 의정부의 정3품 관원을 보냈으나 미국은 낮은 품계라며 면담을 거부했다. 미국 함대가 외국배의 항행을 금지하는 경고표석을 지나 강화수로로 들어서자 어재연 강화 수비대장은 침범이라고 판단해 발포를 명령했다(『환재집』).
로저스 제독은 일기 형식의 『조선원정기(Expedition To Corea)』에서 “기동전함 팔로스(Palos)호와 모노카시(Monocacy)호 편으로 1866년 프랑스군이 작성한 해도를 따라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해협 수심 측량에 나섰다가 6월 2일 광성보 앞에서 손돌목 돈대의 포격을 받았다”고 기술했다.
500명의 수병과 150명의 해병을 투입한 미국은 3일간의 교전 끝에 초지진과 덕진진을 빼앗고 광성보에서 격전을 벌여 수비대장의 수자기(帥字旗)를 빼앗았다. 어재연을 비롯한 조선 수비군 350명은 대부분 전몰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남북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었다. 함상에서는 함포, 육지에서는 야포를 동원해 조선군 요새를 초토로 만들었다. 지휘관이었던 블레이크 중령은 『조선원정기』에서 “남북전쟁 때보다 더 많은 포화를 쏟아냈다”고 증언했다. 조선군의 불랑기포로는 사정거리나 위력 면에서 당해낼 수 없었다. 소총 수준도 큰 차이를 보였다. 서서 1분에 겨우 한 발꼴로 쏘는 조선군의 화승총으로는 엎드려서 1분에 10발 이상을 쏘는 미국의 레밍턴 소총을 당해낼 수 없었다. 면 30겹을 누벼 만들어 방탄이라고 자부했던 강화 수군의 면갑(綿甲)도 미군의 소총과 야포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광성보에서는 육박전도 벌어졌다. 『조선원정기』는 조선군 전사자가 243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은 인천부사 구완식이 화성유수 신석희에게 답한 『소성진중일지』에 전사자 수를 100여 명이라고 기재했고, 『고종실록』은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했다.
교전 중에도 양측은 ‘통상 요구’와 ‘거부’를 되풀이했다. 조선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유리한 수교 협상을 할 수 있었음에도 철수 결정을 내린다. 포로 석방을 내세워 계속 통상 협상을 요구했으나 조선 측이 완강히 버티자 더 이상 협상을 진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북전쟁 직후여서 타국과 장기전을 치르기에는 부담이 있던 요인이 미군의 철수 배경으로 작용했다. 조선은 ‘영토를 잃지 않았으니 패배한 것이 아니다(『고종실록』)’라고 여겼다. 전투에는 졌으나 전쟁에는 이겼다고 자부한 것이다.
서양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도 컸지만 대원군에게 서양은 사악한 존재여서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물리쳐야 할 대상이었다. 대원군은 병인년과 신미년의 두 전쟁이 별 대가 없이 마무리되자 양이를 물리쳤다는 자만심에 빠졌다. 조정 문신들도 ‘서양의 배를 몰아내어 태평성대를 이루니 청(淸)인들도 칭송했다(『성재집』·『미산집』 등)’라고 자찬했다. 기고만장해진 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결의를 다졌다.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려 들지 않는다면 매국이다.” 구보는 이를 우물 안 개구리의 포효였다고 여긴다. 미국의 무력을 직접 목도한 박규수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염려스럽다”(『환재집』)며 근심에 빠졌다. 조선의 마지막은 박규수의 우려대로 진행됐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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