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능 시대의 화가

입력 2025. 12. 03   15:25
업데이트 2025. 12. 0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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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



초지능 시대가 곧 도래할 거라고 한다. 초지능 시대가 되면 직업을 잃게 될 거라고 걱정하는 이가 많다. 그런가 하면 초지능 시대가 오면 인류가 멋진 삶을 누리게 될 거라고 낙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초지능 시대를 앞두고 두 개의 극단적인 입장으로 나뉘는 것은 미술계도 마찬가지다.

감성을 다루는 예술 가운데서도 미술은 매우 이성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장르다. 무용이 몸에 의지한다면 미술은 일단 눈에 의지한다. 몸의 중력과 감성은 장소에 매여 있다. 눈은 몸의 일부이긴 하지만, 장소의 중력과 감성을 초월해 소실점 너머 무중력의 공간에 다다르는 인식의 출발점으로서 몸과 분리될 수 있는 기관이기도 하다.

시각에서 출발하는 미술은 필경 인식과 이성에 연결될 수밖에 없다. 감성은 주로 비정형 정보에 기반한다. 이성은 대체로 정형 정보에 기반한다.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정형 정보화로 처리하기가 용이하다. 인공지능(AI)은 정형 정보 처리에서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런 점에서 초지능 시대가 도래한다면 예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이성을 다루는 미술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미술의 가장 큰 위기는 사진의 발명이었다. 당시 초상화는 화가들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사실의 재현력만 뛰어나도 훌륭한 초상화 화가로 대접받았다.

19세기 중반 사진이 등장했다. 사실의 재현력은 사진이 더 뛰어났다.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자신들의 밥벌이를 사진가들에게 빼앗길까 노심초사했다. 화가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지탱해 오던 재현력의 가치를 버리고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만 했다. 예컨대 사물의 새로운 해석력 혹은 표현력 같은 가치다. 그리하여 등장한 미술이 인상파다.

시간이 지나자 사진은 미술의 동반자가 됐다. 사진은 이제까지 인간이 감지하지 못했던 짧은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 순간들을 이어 나가면 동영상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물을 바라보는 화가들의 시각이 확장됐다. 다시점, 복수시점에 몰두하던 미래파 미술은 사진에 영향받은 바가 컸다.

올 5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개관했다. 지난 11월부터 이곳에서 ‘사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사진가가 아닌 화가들의 작품이 주인공이다. 사진으로 작업했거나 사진으로 자신들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작품, 사진을 응용해 페인팅으로 구현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1970년대 작품이 주를 이룬다. 1970년대는 국내에서 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카메라에 담긴 영상은 정형 정보다. 이 무렵 한국 현대미술계에서는 비정형 정보가 주를 이루는 신체성의 미술, 이른바 단색화라는 장르도 함께 대두됐다.

인상파 시대 화가들은 카메라가 매우 두려웠을 것이다. 1970년대 한국 화가들은 카메라를 작품 제작의 적극적인 수단으로 삼았다. AI도 마찬가지다. 두려운 적이 될 수도 있고 다정한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인상파 이후 초상화가는 다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유화 혹은 한국화로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초상화에서 재현력보다 표현력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또 단색화처럼 카메라가 아예 따라오지 못하는 영역의 미술을 시도하기도 한다. 한때는 두려웠던 사진을 동반자로 혹은 경쟁자로 삼아 미술은 살아남았다. 초지능 시대의 미술 역시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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