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서울 종로구 익선동
영평군 살던 누동궁 회랑 익랑서 이름
정세권이 세운 주택회사 조선집 공급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인 정주권 지켜
물산장려운동 지원 문화부흥운동 펼쳐
예전 선술집·목로주점이 차지한 골목
지금은 카페·레스토랑·주점 문전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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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낙원동에서 종로3가 사이 익선동(益善洞)은 몇 년 전부터 ‘핫플’이 됐다. 익선동은 2014년 이전엔 조용한 주거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청춘들의 발길이 요란하다. 카페, 레스토랑, 와인 하우스, 펍, 갤러리, 패션 가게, 향수 가게 등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금위영 길’ 같은 유서 깊은 명칭의 골목에 줄지어 선 조선집들이 풍기는 ‘레트로(복고주의)’와 트렌드를 입힌 가게들이 자아내는 ‘뉴트로(신복고주의)’가 맞물리면서 첨단 도시 서울의 이색 공간으로 급부상했다. 친구의 하숙집이 있던 1970년대 풍경을 기억하는 구보의 눈에는 상전벽해로 비친다.
국내외 젊은이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을 찾아 파스타, 빵을 먹고 커피나 와인을 마시며 쇼핑을 즐긴다. 공간을 배경으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모습도 많이 눈에 띈다. 소비와 문화가 만나는 ‘힙’한 공간이 되고 있다. 한옥의 변모는 서울을 찾는 외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구보는 이곳이 제공하는 서울 풍경에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이 공간의 터줏대감은 사도세자의 서장남인 은언군 이인의 후손이었다. 은언군은 정조 생전 끊임없는 모함을 받아 강화도로 유배됐고, 유배 기간에도 역모 원인 제공자로 지목됐으나 형인 정조의 비호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1800년 정조 사망 직후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인물이다. 그의 아들 이광의 3남인 이번이 후사가 없던 순조의 뒤를 이어 철종에 오르면서 이광은 전계대원군이 됐다. 선조의 부친 덕흥군, 인조의 부친 정원군, 고종의 부친 흥선군과 더불어 조선의 네 대원군을 이룬다. 철종은 둘째 형 이욱에게 영평군 군호를 내리고 한때 가족들이 살았던 집을 증개축해 궁으로 삼았다. 익선동 166번지 누동궁(樓洞宮)이었다. 궁호는 근처에 있던 다락우물(樓井)에서 따왔다. 이 궁의 존재가 궁동·누동·익동 등 주변 지명에 영향을 미쳤다. 익동은 누동궁의 트레이드마크인 기다란 날개 모양의 회랑인 ‘익랑(翼廊)’에서 유래해 익랑동을 거쳐 익동으로 정착했다. 한자명은 익동(益洞)으로 바뀌었다. 1914년 동명을 정하면서 익동과 정선방(貞善坊)의 이름을 합성하면서 익선동이 됐다(『서울지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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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동은 대표적인 한옥 밀집지역이었다. ‘한옥’은 1990년대부터 쓴 표현이고 이전엔 ‘기와집’, 그전엔 ‘조선집’이라 불렀다. 『임꺽정』을 쓴 소설가 홍명희와 명창 송만갑 등도 이곳에서 살았다. 구보는 익선동 골목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다. 경남 고성 출신인 정세권(1888~1965)이다. 이 유서 깊은 공간을 1920년대 한국 최초의 뉴타운으로 변모시킨 주인공이다. 그는 전통 어린 청계천 북쪽 땅을 일본인에게 내주지 않으려고 건양사라는 주택회사를 세워 사업을 펼쳤다. 10평 남짓한 평수에 본채와 행랑채를 배치하고, 가운데에 중정(中庭) 대신 중당(中堂)을 비치했다. 화장실과 창고 건물 위에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장독대를 두었다. 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는 함석 챙을 잇댄 퓨전 한옥이었다. 규모가 알맞고 구조가 좋아 신혼부부들의 환영을 받았다. 신문에 광고를 내며 더 나은 설계를 공모한 결과였다. 서민용이어서 밑진 값에 분양했지만 곧바로 또 지어 원가를 줄이는 방식으로 손실분을 벌충했다(매일신보, 1936.5.21.).
정세권은 익선동의 성공을 발판 삼아 당시 친일파들이 소유하고 있던 가회동 일대 땅을 사들여 필지를 쪼갠 다음 작은 조선집을 다량 지었다. 1930년대 만들어진 이 뉴타운이 오늘날 ‘북촌(北村)’이라 부르는 서울의 북쪽 마을이다. 정세권의 노력으로 청계천 이북 서울은 조선인의 집단거주지로 자리 잡았다. 정세권은 주택사업으로 돈을 모은 후 ‘조선인은 조선 상품을 구매하자’는 민족운동인 물산장려운동 재정을 지원하고, 그 추진기구로 지금의 낙원상가 앞에 장산사(奬産社)를 세워 상무이사를 겸임했다. 건양사와 장산사 두 회사를 운영하며 정세권은 본격적인 문화부흥운동에도 나섰다. 1931년 화동에 조선어학회를 세우면서였다. 민족주의 운동을 펼친 신간회를 후원한 데 이어 익선동에는 절집 유심사를 지어 불교 서적 편찬을 도왔다. 승려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1879~1944)도 여기에 머무르며 『님의 침묵』 『불교대전』 등을 썼다. 정세권의 애국 활동에 대해 만해는 “백난중분투하는 정세권 씨에게 감사하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칭송을 표하곤 했다.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활동이 조선어 말살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해 탄압에 나섬으로써 정세권은 모든 걸 잃고 낙향하게 된다. 구보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세권이 자기 방식으로 애국 활동을 펼친 민족 영웅이었다고 평가한다.
익선동 골목에는 아직도 족히 150년은 됐음 직한 고가(古家)의 흔적이 남아 있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예전 이 주변에는 서서 먹는 ‘선술집’과 나무판자를 깔고 앉아 먹는 ‘목로주점’이 있었다. 국밥과 떡, 부침개들이 주메뉴였다. 우이동에서 장작을 메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온 나무꾼들이 짐을 부리고선 주린 배를 채웠다. 지금도 이곳에는 막걸리 한 잔을 1000원에 파는 선술집이 있다. 멸치, 마늘종 등 가벼운 안주가 공짜로 제공된다. 고객은 예전 이 길을 기억하는 노년층이다. 이곳 골목길을 걷노라면 야화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1940년대에 거나하게 취한 시인 변영로(1897~1961)가 귀가하다 야경꾼이 시야에 들어오자 담장에 몸을 걸쳤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야경꾼이 다가와 웃음을 참고서 방망이로 쿡쿡 찌르며 물었다. “뭐요?” “빨랩니다” “무슨 빨래가 말을 해?” “입은 채로 빨았습니다.” 변영로가 『명정 40년』에 실은 이 일화는 한 편의 농익은 해학극이었다.
석양이 질 무렵 종로3가역 익선동 입구는 갈매기고깃집, 국숫집, 순댓국집들을 위시해 온갖 주점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낙원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마차로 덮인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열심히 살았던 선조들의 자취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또한 열심히 삶을 즐기는 동시대인의 모습도 보게 된다.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퍼지고 발걸음은 더욱 느릿해진다. 구보도 어디엔가 앉아 같이 한잔하고 싶어진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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