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없는 정보전 녹슨 칼론 못 막는다

입력 2025. 11. 23   16:15
업데이트 2025. 11. 2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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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그들이 온다 - 환경변화 맞는 법령 손질을 

냉전시대 적국 한정된 현행 간첩법
대부분 국가에 적용 못해 처벌 느슨
낡은 법 고쳐 정교한 안보전략 짜야

 

크리스토퍼 캐시·크리스토퍼 베리의 간첩죄 기소 포기를 계기로 야당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크리스토퍼 캐시·크리스토퍼 베리의 간첩죄 기소 포기를 계기로 야당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영국을 뒤흔든 중국 스파이 처벌 논란


최근 영국은 중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2명의 영국인 처벌을 두고 큰 논란이 일었다. 검찰이 관련자 기소를 포기하자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기소를 포기했다는 주장과 사건 발생 당시 간첩 관련 법이 미흡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증폭된 것이다.

사건은 2023년 3월 영국 경찰이 의원 보좌관이자 국회 내 싱크탱크인 ‘차이나리서치그룹’ 간사 크리스토퍼 캐시와 중국에 체류하며 컨설턴트로 활동하던 그의 친구 크리스토퍼 베리를 중국을 위한 스파이 혐의로 체포하면서 시작됐다.

캐시가 수집한 영국의 중국 관련 정책, 대만 국방부 관리들과의 비밀회의 내용 등 민감한 정보를 베리가 전달받고 다시 중국 정보요원으로 알려진 ‘알렉스’가 보고받는 구조였다. 영국 검찰은 2024년 4월 방대한 통신기록을 바탕으로 혐의가 확실하다며 기소했다. 하지만 재판을 불과 1개월 앞둔 지난 9월 15일 이례적으로 기소를 포기했다.

검찰은 ‘공공비밀법(Official Secret Act)’에 따라 기소된 두 사람을 처벌하려면 이들이 정보를 넘긴 중국이 영국의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정부 관계자가 증언해야 하는데, 정부가 명확한 증언을 해 주지 않아 기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영국의 공공비밀법이 간첩죄의 요건으로 ‘적에게 유용한 정보’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서다.

야당은 키어 스타머 총리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국내 정보와 방첩을 담당하는 보안국(MI5)의 켄 매캘럼 국장도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행위가 기소되지 않는 것에 좌절감을 느낀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스타머 총리는 의회에서 중국의 활발한 첩보활동이 영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진술한 국가안보부보좌관의 진술서까지 공개하며 무관함을 주장했다. 또 기소 실패는 전임 보수당 정권이 중국을 위협세력으로 규정하지 않아서라고 화살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일간 더타임스가 중국이 해킹으로 수년간 영국 정부의 기밀문건을 빼내 갔지만, 보수당의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이를 은폐했다는 내부자 증언을 폭로하면서 정치공방은 더욱 거세졌다.

정치적 문제가 아닌 시대에 맞지 않는 법률 때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현대 국제사회에서 전쟁 중이지 않은 이상 특정국가를 안보 위협국이라고 쉽게 단정할 순 없다.

 

 

중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영국인 크리스토퍼 베리가 지난해 4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치안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중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영국인 크리스토퍼 베리가 지난해 4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치안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정보전 대비태세 강화하는 영국

이제 이번 사건과 같이 외국으로 비밀이 빠져나갔음에도 해당국을 ‘적’으로 규정하지 못해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는 더 이상 영국에서 반복되지 않을 전망이다. 영국은 1911년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독일의 스파이 행위에 대응하기 위해 제정돼 시대에 맞지 않는 ‘공공비밀법’을 대체하고자 2023년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을 만들어 2024년 시행에 들어갔다.

새로운 법에선 기존 ‘적국’ 중심에서 외국 정부뿐만 아니라 그 지시와 통제를 받는 개인과 단체까지 포함하는 개념인 ‘외국세력’을 대상으로 했다. 국가안보뿐 아니라 국가이익까지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자국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정치 개입(영향력 공작)에 대응하고자 외국 정부의 지시에 따른 정치, 로비활동 등록을 의무화하는 규정(Foreign Influence Registration Scheme)을 신설하기도 했다.

2022년 중국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와 연계된 중국계 변호사 크리스틴 리가 영국 의회 중진 의원들을 대상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제공하며 친중 로비활동을 벌인 게 밝혀졌음에도 처벌할 수 없었던 문제점을 개선한 것이다. 당시 크리스틴 리는 영국 방첩기관인 MI5가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며 의원들에게 경계하라고 알린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국가안보가 개인의 명예에 우선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사건과 관련한 법률적 문제점과 더불어 또 하나의 이슈는 중국 위협에 대한 영국 정치권의 태도다. 야당인 보수당은 노동당의 스타머 총리가 홍콩 민주화운동 탄압과 사이버 공격 등으로 악화된 양국 관계 속에서도 지난해 11월 6년 만에 시진핑 국가주석과 면담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정부가 중국의 투자를 유치하려 사건을 왜곡시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국 총리실의 매슈 콜린스 국가안보부보좌관이 작성한 증언문서에는 ‘중국의 첩보활동이 영국의 경제적 번영과 민주제도의 통합성을 위협한다’고 명시해 중국이 국가안보 위협국임을 확인했다. 다만 ‘영국 정부는 이해와 협력으로 중국과의 건설적 관계를 추구한다’고 부연 설명해 검찰이 중국을 적성국으로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뿐 아니라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고려해야 하는 많은 국가의 공통된 딜레마다. 하지만 경제적 교류와 협력으로 국익을 추구하면서도 어떻게 국가안보를 지켜 나갈 것인지는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므로 각자 현명하고 정교한 안보전략과 외교정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외국의 영향력 공작 위협 대응해야

우리나라 형법의 간첩죄(제98조)도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라고 한정하고 있어 적국이 아닌 국가를 위해 간첩을 하더라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는 치명적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는 6·25전쟁이 끝난 뒤 2개월도 되지 않은 1953년 9월 18일 제정돼 적국이 분명하던 입법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냉전이 끝나고 국가 간 교류와 협력이 극대화된 현재의 국제정치 상황에선 서로 전쟁을 하고 있지 않는 이상 적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북한을 위한 간첩 행위의 경우에만 국가보안법과 적국에 준하는(북한은 우리 법체계상 국가가 아닌 반국가단체) 것으로 보는 판례에 따라 간첩죄를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그동안 중국에 군사기밀을 유출한 군 장교와 정보사령부의 흑색요원 명단 등 민감한 비밀을 중국 정보기관에 제공한 군무원 등을 형법상 간첩죄로 처벌하지 못하고 형량이 낮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최근 각국에서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스파이 사건과 국내에서 발생한 충격적 사건들로 국민의 방첩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정치권에서도 형법상 간첩죄 개정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참에 미국의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이나 영국이 새로 제정한 국가안보법에 규정한 외국영향력등록제도(FIRS)처럼 외국의 영향력 공작에 대응하기 위한 법적 장치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현대 정보전에서는 단순한 첩보 수집뿐 아니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특정국의 여론을 유도하려는 영향력 공작 위협이 커져 가고 있어서다.

이러한 비밀공작 활동은 기존의 유력 정치인 포섭과 더불어 해킹과 SNS를 통한 직접적 여론 조작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어 여론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에 치명적 위험을 초래한다. 오래된 낡은 법으로는 더 이상 변화된 환경의 정보전에 대응할 수 없음을 빨리 깨닫고 녹슨 칼을 갈고닦아야 할 때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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