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함 마지막 항해 일지

입력 2025. 11. 20   17:20
업데이트 2025. 11. 2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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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도 처음처럼…34년 늘 그랬듯이 
해치 닫히자 말수 줄였다 눈빛만 오갔다

34년 견딘 무게
장비 ‘이상 소음’ 듣기 위해 외부와 단절, 사생활 없지만
묵직한 함체, 물 가르자 익숙한 손놀림 흔들림 없어

진짜 라스트 크루
겉은 낡았어도 속은 20년 더 탈 수 있는데…
단 1초 오차 없이 입항 명예롭게 마지막 임무 완수

다음 달 퇴역을 앞둔 대한민국 첫 잠수함 장보고함이 19일 마지막 항해에 나섰다. 34년 운용을 끝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기 직전, 국방일보가 외부인의 접근이 극도로 제한된 잠수함에 동승해 그 순간을 기록했다.  글=조수연/사진=조용학 기자

 

진해군항으로 돌아온 장보고함 승조원이 수직사다리를 타고 올라 마지막 입항을 준비하고 있다.
진해군항으로 돌아온 장보고함 승조원이 수직사다리를 타고 올라 마지막 입항을 준비하고 있다.



장보고함 승조원 맹세
나는 장보고 대사의 혼이 깃든 한국 해군 1번 잠수함 장보고함 승조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장보고함의 발전이 곧 잠수함부대의 발전이요, 잠수함부대의 발전이 곧 대양해군 건설의 첩경임을 자각하여 전술·전기 연마를 생활화하고 솔선수범하며 상경하애(上敬下愛)와 인화단결(人和團結)로 굳게 뭉쳐 국가와 해군과 잠수함부대에 충성하는 장보고함 승조원이 된다.

해치(승강구)를 열고 철제 사다리 이용해 함으로 내려가자마자 휴대전화 신호가 끊겼다. 극도로 좁은 구조에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장보고함의 마지막 항해는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시작됐다. 승조원들은 말수조차 줄인다. 장비의 ‘이상 소음’을 먼저 듣기 위해서다. 체취와 음식 냄새가 섞여 환기되지 않는 공기, 누구 하나 감기라도 걸리면 순식간에 퍼지는 밀폐된 공간, 사생활이란 없는 곳. 장보고함이 수십 년 버텨온 일상의 무게다.

출항하자 내부 공기는 달라졌다. 승조원들은 각자 자리에서 장비를 운용하며 함을 천천히, 정확하게 움직였다. 마지막 항해라지만 손놀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묵직한 함체가 물을 가르자 조타실에서 단정한 교신이 쉼 없이 오갔다.

하태경(상사) 전탐장은 너덜너덜해진 항해 일지를 펼쳐 빽빽이 글씨를 적어 내렸다. 표정엔 장보고함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과 마지막까지 ‘정확히 운용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동시에 비쳤다.

 

 

 

지난 19일 항해를 끝으로 34년의 대한민국 영해 수호 임무를 마친 장보고함.
지난 19일 항해를 끝으로 34년의 대한민국 영해 수호 임무를 마친 장보고함.

 



함수로 향하자 분위기는 또 달라졌다. 커피를 종이컵에 나눠 담아 돌리고, “마지막 항해를 위하여”란 건배사가 오갔다. 안병구(예비역 해군준장) 초대함장은 마스트에서 내려오며 “34년 젊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처음 운용할 땐 모든 게 생소했는데… 유지를 잘해준 후배들에게 고맙습니다.”

인수 무장관·주임원사·내연부사관도 모처럼 한데 모였다. 청춘을 바친 잠수함과의 재회에 벅차오른 선배들은 잠수함 특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추억들을 쏟아냈다. 잠수함 생활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벌였던 ‘수염 기르기 대회’에서 매번 1등이던 주임원사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주임원사였던 신영태 예비역 해군원사는 “여긴 사생활이라는 게 거의 없다”며 “그래도 제가 할 일은 승조원들 얘기 들어주고, 해결 안 되는 건 함장님께 전하는 거였다”고 회상했다. 

안 초대함장이 “함장이 편하면 나머지 승조원이 불편하고, 함장이 불편해야 나머지가 편하다”며 웃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침대 하나를 두세 명이 돌려 쓰는 건 기본이다. 180㎝ 길이의 침대라 키가 큰 사람은 머리맡에 구멍을 뚫어 썼다. 한 승조원이 “잠수함 타려면 성격이 좋아야 한다. 정신 무장이 먼저”라며 웃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장보고함 승조원들.
각자의 자리에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장보고함 승조원들.

 


30년 넘게 운용했지만, 정비 상태만큼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초대함장은 “겉은 낡았어도 속은 20년은 더 탈 만큼 단단하다”고 했다. 실제로 잠수함 내부엔 마지막 항해임에도 먼지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승조원들의 세심한 손길 덕에 장보고함은 나이를 잊은 듯했다. 

부대 해체를 앞둔 승조원들은 “진짜 ‘라스트 크루(Last crew)’다. 다음에 갈 부대를 정하는 인사 상담 중”이라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3년 동안 타수와 의무장 역할을 맡았다는 홍명석 상사는 “배도 떠나보내지만 동료들과 헤어지는 것도 참 묘하다”고 했다.

오후 3시.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입항. 잠수함 안에 마지막으로 입항 방송이 나왔고, 선착장에는 군악대 연주가 울려 퍼졌다. 장보고함이 마지막 임무를 명예롭게 끝낸 순간이었다.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한다’는 잠수함사령부의 신조를 완수해 낸 장보고함의 항해는 마지막까지 은밀하고 완벽했다.




이제권(소령) 장보고함장
첫 잠수함의 마지막 항해…34년의 시간 압축한 듯한 영광스러운 경험

다국적 해양안보작전을 수행하는 연합해군사령부에서 복무하던 이제권 소령은 지난 2월 장보고함의 마지막 함장으로 부임했다. 장보고급에서 소령이 함장을 맡은 첫 사례다. 

그는 “역대 대령·중령급이 지휘해 온 1번 잠수함의 마지막을 책임진다는 사실 자체가 큰 무게였다”며 “‘끝까지 안전하게’ 운용하는 데 모든 판단을 집중했다”고 말했다.

노후 플랫폼 운용 기조에 대해 그는 “잠수함에서 안전은 절대 원칙”이라며 “훈련함으로 전환된 뒤엔 교범과 원칙에 맞춰 절제된 전비태세를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장보고함의 유산은 초대함장이 남긴 표어였다. ‘확인은 생존의 지혜, 숙달은 필승의 열쇠’가 그것. 그는 “이 정신을 그대로 이어왔기 때문에 34년 동안 단 한 번의 중대 사고도 없었다”고 전했다.

초대함장과 함께한 마지막 항해에 대해 “34년의 시간을 한 장면으로 압축한 듯했고 영광스러운 경험이었다”며 “마지막 함장으로서 소임을 다해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다짐했다.


안병구(예비역 해군준장) 초대함장
대한민국 잠수함 시대 열고 완벽히 임무 마친 모습 보니 감격스러워

“여기가 내 청춘을 바친 바다예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네요.”

해군에 잠수함은 없고 구축함만 있던 시절, 대잠전 훈련은 가장 비중이 큰 훈련이자 초급장교에게 인기 있는 훈련이었다. 안 초대함장(당시 중위)은 엘리트 초급장교만 이수할 수 있던 미국 해군이 주관하는 대잠전 유학을 다녀왔다. 6개월 동안 집요하게 팠던 잠수함 공부가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소령 땐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잠수함 전력 획득과 관련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보고서는 우리 잠수함의 첫 시대를 여는 전략적 청사진 역할을 했고, 장보고함 탄생과 승조원 교육·운용 체계 구축의 기초가 됐다. 그는 “잠수함은 모든 기술의 집합체로, 손이 안 간 곳이 없다”며 “승조원들에게는 전문성과 집요함, 배려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안 초대함장은 후배들이 잠수함 승조원이 되는 길을 계속 선택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냔 질문에 이렇게 잘라 말했다. “군의 동기부여는 진급과 보상, 딱 두 가지입니다. 잠수함 승조원들을 확실히 보상해 주고 파격적으로 대우해 줬으면 합니다.”

그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해군의 숙원사업이던 잠수함 시대를 연 게 장보고함인데, 완벽히 임무를 마친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고 자부심이 큽니다. 이제는 (후배들이) 핵추진잠수함 시대를 향해 나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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