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성지에서 외치는…고장난 지구에도 봄은 오는가

입력 2025. 11. 20   16:48
업데이트 2025. 11. 2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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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전시공간 & 전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봄의 선언’ 

공간  5·18 민주화 상징 옛 전남도청에 자리
건축가 우규승 설계 복합문화예술공간
전시  ‘자본세’ 키워드 인류 직면 문제 고민 
작가 16명 설치, 영상, 미디어 27점 전시
 

국립어시아문화전당 복합전시 1관에서 열리고 있는 ‘봄의 선언’에 전시된 이끼바위쿠르르의 ‘누가 마을을 잊었는가'. 필자 제공
국립어시아문화전당 복합전시 1관에서 열리고 있는 ‘봄의 선언’에 전시된 이끼바위쿠르르의 ‘누가 마을을 잊었는가'. 필자 제공



낙엽이 눈처럼 내리던 늦가을이 지나가고 어느덧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겨울은 춥고 시린 인상의 계절이다. 우리는 주로 힘든 시기와 풍파를 겨울에 비유하곤 한다. 또 차가운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따뜻한 봄이 찾아온다고 믿는다. 봄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가 찾아온 상태, 또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계절이다. 하지만 최근 보도되는 기후 위기에 관한 기사들을 보다 보면 종종 희망의 상징인 봄이 소멸 위기를 맞았음을 체감하곤 한다. 봄이 상징하는 의미가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되려면 지금의 우리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막 가을이 시작된 지난 9월 광주광역시에서 ‘봄의 선언 Manifesto of Spring(2025년 9월 5일~2026년 2월 22일)’이란 전시가 시작됐다. 가을에 열리는 ‘봄의 선언’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봄’이라는 단어에 담곤 하는 평화와 새로움에 대한 선언일까. 이 전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National Asian Culture Center·ACC)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2015년 11월 25일 아시아 문화를 주제로 하는 복합문화예술기관으로 공식 개관했다. ‘세계를 향한 아시아 문화의 창’이라는 구호처럼 아시아 문화예술에 주목해 아시아 각 국가와 문화적으로 교류하고 새로운 예술과 아이디어의 창조, 확산을 지원하는 역할을 표방하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위치한 곳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옛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다. 지하 4층~지상 4층으로 이뤄진 아시아 최대 규모의 문화·예술공간인 이곳은 옛 전남도청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데, 대부분 시설물이 지하로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장소의 상징성을 고려한 것으로,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우규승의 건축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전시 '봄의 선언' 입구.
전시 '봄의 선언' 입구.

 

조던 작가의 '누가 마을을 잊었는가'.
조던 작가의 '누가 마을을 잊었는가'.


한국 출신인 세계적인 건축가로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규승은 한국적 정서와 서구적 건축 기법을 융합한 독창적인 설계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도시 맥락과 의미,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중시한다. 그가 설계한 대표적인 국내 건축물로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위한 대규모 주거 공간으로 기획된 올림픽선수촌아파트와 1994년 김수근건축상을 받은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있다.

언급한 것처럼 우규승은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공간을 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물을 설계할 때 주요 시설을 지하에 배치하는 구조를 택했다. 또 지상의 열린 광장과 공원을 배치해 옛 전남도청 건물의 상징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이 주변 공간에 스며들게 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크게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어린이문화원, 민주평화교류원, 야외 문화 공간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문화창조원 복합전시관에서 주로 전시가 이뤄지는데 ‘봄의 선언’ 역시 복합전시 1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봄의 선언’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아시아 여러 기관과 협력해 2024년부터 연구해 온 민주주의를 중심 의제로 한 결과물이다. 현재 국내외 작가(팀) 총 16명의 설치, 영상, 미디어 작품 27점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된 작품들은 작가를 포함한 과학자, 예술 이론가 등 여러 분야 전문가의 협업으로 창작돼 다양한 방식으로 봄의 의미를 묻고, 또 다른 봄의 의미를 선언한다.

전시는 특히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사회 이후 변화된 삶의 모습과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동시에 미래에 나아가야 할 방향들을 전하고 있다. 전시실에 입장하기 전 입구에는 테리토리얼 에이전시(Territorial Agency)의 ‘석유 박물관(2015~ )’이라는 작품이 설치돼 있다. 지구의 지형을 형상화한 기울어진 사다리꼴 형태 주변으로 8개의 모니터가 석유 인프라 지도를 위성 이미지로 나타낸다. 이는 석유산업이 지구 환경과 인간 사회에 미친 영향과 변화를 시각화하고 있다.

서동진 작가는 산업사회의 물질적 기반인 ‘면직 산업, 석탄, 기계’를 키워드로 한 ‘석탄 백탄 타는데: 면(綿)-탄(炭)-기(機)(2025)’라는 미디어 설치 작품을 통해 산업혁명 이후 자연과 인간의 변화, 생태 위기의 기원에 대한 시각적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작품 외에도 관람객의 얼굴을 자연의 생명체와 혼합시킨 인터랙티브 작품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경계를 묻는 앤 덕희 조던(Anne Duk Hee Jordan) 작가의 ‘깊은 곳으로(2025)’와 동아시아에서 사라져 가는 마을의 흔적을 통해 해체된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고 자연과 인간의 왜곡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끼바위쿠르르의 ‘누가 마을을 잊었는가(2025)’ 등 다양한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 위기를 예술적으로 조명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봄의 선언’은 ‘5·18 민주화운동의 인권과 평화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승화한다’는 배경에서 출발해 민주, 인권, 평화의 가치를 조명하는 전시와 프로그램을 기획해 온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더욱 폭넓게 가치를 확장하고자 한 기획의 실천이다. 특히 시각예술가뿐만 아니라 자본세와 생태 위기에 대한 문제를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협업해 여러 시각으로 돌아본다. 이는 시각 예술이라는 경계를 넘어 창작에 있어 민주적 형식의 도입으로 볼 수 있다.

격변의 역사 속에서 어려운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를 이룬 아시아 국가들이 당면한 또 다른 민주와 인권, 평화의 문제는 더없이 복잡하다. 기후 위기, 생태 위기라는 지구적 위기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민주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인권을 넘어 모든 생명체가 누려야 할 생명권과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의 가치는 무엇인가. 모든 생명체가 차별 없이 지구라는 터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실천하는 것이 오늘날 맞이한 민주주의의 목적이며 ‘봄의 선언’이다. 결국 ‘봄의 선언’은 사계절의 순환 속에서 다시 돌아올 봄을 의미한다. 이는 희망적인 시작과 실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필자 김유진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고, 문화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을 연구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필자 김유진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고, 문화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을 연구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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