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이 되려는 자, 이 성의 왕좌에 앉아라

입력 2025. 11. 19   15:26
업데이트 2025. 11. 1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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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카나번성(城)-‘연합왕국’ 초석을 놓다

4개 지역 연합왕국 첫 단추 된 웨일스
13C 에드워드 왕 2차례 침공해 정복
강·바다 만나는 곳에 ‘돌의 요새’ 올려
8개의 다각형 탑, 사각지대 없이 방어
에드워드 2세부터 왕세자 즉위식 열려
현 찰스 3세도 ‘웨일스 왕자’로 시작

 

카나번성 전경. 필자 제공
카나번성 전경. 필자 제공


영국 하면 사람들은 흔히 잉글랜드만 떠올린다. 하지만 오늘날 영국은 총 4개 지역이 한 몸을 이룬 일종의 ‘연합왕국’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중심 세력인 잉글랜드가 역사를 거치면서 다른 지역(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을 통합해 온 과정이 오늘날 영국의 국가 형성사라고 볼 수 있다. 첫 단추를 낀 사건은 13세기 말 잉글랜드의 웨일스(Wales) 정복이었다. 그리고 이를 표상하는 상징물이 웨일스에 있는 카나번성(1986년 세계문화유산 지정)이다.

영국 내 다른 유명 관광지들과 비교해 카나번성은 한국인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다. 현재 인구 약 9000명의 소도시 카나번은 웨일스 북서 해안가에 있으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일랜드와 마주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고대 로마 점령 시절부터 인근 지역 군사 및 무역 거점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13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가 웨일스를 정복한 후 이곳에 웅장한 성곽을 세우면서 도시 발전이 본격화됐다. 웨일스어로 ‘돌의 요새’라는 의미를 지닌 ‘카나번’이란 명칭에 담겨 있듯, 원래부터 도시 자체가 요새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합병됐을까? 이는 잉글랜드에 의한 일련의 침략전쟁을 통해서였다. 13세기 초부터 웨일스 지역은 여러 토착 왕국과 씨족들이 독립적으로 할거(割據)하고 있었다. 호시탐탐 정복 기회를 엿본 잉글랜드 왕실과는 계속해서 긴장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웨일스의 가장 강력한 왕조 중 하나였던 귀네드 왕국은 잉글랜드와 북부 국경을 접하며 대립해 왔다. 1272년 즉위한 에드워드 1세는 초반부터 국경 위협 세력인 웨일스를 잉글랜드에 완전히 복속시키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마침내 즉위 5년이 되는 해에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277년 에드워드 왕은 병력을 이끌고 귀네드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이른바 1차 웨일스 정복 전쟁이 벌어졌다. 잉글랜드군의 조직력과 우월한 무기체계에 웨일스 군대가 초반부터 밀려 싱겁게 패퇴하면서 전쟁은 단기간에 끝나고 말았다. 전쟁 결과 웨일스 일부 지역이 잉글랜드에 편입됐고, 당시 웨일스의 강자이던 루웬 왕은 항복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양국 간 충돌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항복 이듬해에 웨일스의 전설적 지도자 라이웰린의 주도하에 웨일스 전역에서 잉글랜드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사태를 관망하던 에드워드 왕은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1282년 2차 침공을 단행했다. 초반에는 접전이 벌어졌으나 곧 반란군의 전력은 약화됐다. 특히 1282년 접전 중 지도자 라이웰린이 전사하면서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듬해 잔존 저항세력마저 토벌되면서 웨일스 전역은 잉글랜드의 완전한 지배 아래 놓이게 됐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카나번성과 같은 웅장한 방어시설이 등장하게 됐을까? 에드워드 왕이 취한 적극적인 정복정책이 배경에 놓여 있었다. 전후 에드워드 왕은 정복지 지배를 공고히 할 의도로 특히 웨일스 북부 일대에 대규모 성곽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전략적 요지마다 성채가 건설됐는데, 이러한 성곽체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카나번성이었다. 성의 구조와 축성 기술, 그리고 인근 성곽들과의 연관성을 통해 당시 잉글랜드의 지배 전략이 어떻게 건축을 통해 실현됐는지를 엿볼 수 있다.

 

카나번성 내부 모습. 필자 제공
카나번성 내부 모습. 필자 제공



애초부터 카나번성은 방어시설이자 정치적 상징물이라는 이중 목적을 갖고 설계됐다. 세이온트 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 성의 위치로 정해졌다. 이곳은 해상과 내륙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쪽은 바다로, 다른 한쪽은 강에 접해 있어서 방어에 매우 유리했다. 에드워드 왕은 프랑스 출신으로 중세 요새 건축의 대가로 명성을 날린 제임스(James of St. George)란 인물을 건축 책임자로 기용했다. 그는 방어는 물론 특히 권력의 과시 수단으로서 성을 디자인하는 데 능숙한 건축 장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복자의 앞선 문명 수준과 통치의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의도하에 성은 웅장한 외관을 자랑했다. 성벽은 두껍고 단단한 석조 구조로서 전체 규모(총 둘레 약 0.8km, 성벽 평균 높이 약 12~15m, 성벽 두께 약 2.4~3.6m)를 통해 그 견고성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퀸스 게이트 및 킹스 게이트와 같은 견고한 성문을 설치했다.

무엇보다도 카나번성은 뛰어난 방어시설을 자랑했다. 성벽을 연해서 총 8개의 중요한 다각형(정사각형과 8각형 형태) 탑들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배치됐다. 전통적인 원형 탑에 비해 사각지대 해소로 적군의 접근 감시와 방어 사격에 유리했다. 특히 세 개의 탑이 결합한 형태인 이글 타워는 높이가 무려 22m에 달해 명실공히 왕실 탑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중 성곽 구조로 축성된 성벽 사이에는 순찰로 및 감시 통로가 설치돼 유사시 병사들이 성 전체를 신속하게 이동하며 방어할 수 있었다. 성 내부에는 수비대 숙소, 군기고, 창고, 그리고 감옥 등 다양한 기능별 공간이 존재했다. 1283년 착공 이래 수차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보강을 거듭한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카나번성이 유명해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이곳에서 거행된 잉글랜드 왕세자의 즉위식이었다. 특히 1969년 영국 왕실의 찰스 왕세자(현 국왕 찰스 3세) 서임식이 바로 이곳에서 있었다.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직접 참여해 공식적으로 아들 찰스에게 ‘웨일스 왕자’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날 찰스 왕세자는 웨일스 귀족과 장로들의 축하를 받으며 카나번성 안에 있는 왕좌에 앉았다. 이 서임식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전통의 부활이자 영국 왕실의 웨일스에 대한 권위를 재확인하는 공식 의식이었다.

이는 웨일스 정복을 완성한 에드워드 왕이 1301년 아들 에드워드를 이곳에서 ‘웨일스의 왕자(후일 에드워드 2세)’로 선언한 데서 유래했다. 이후로 이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의 정식 호칭이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카나번성은 방어거점이라는 군사적 기능은 사라졌으나 왕세자 서임식과 호칭을 통해 잉글랜드 왕권의 상징적 장소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카나번성은 단순한 중세 성곽이 아니었다. 웨일스의 정복자이자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통치철학과 군사전략이 고스란히 반영된 계획형 요새였다. 주변 요충지에 세워진 다른 성곽들과 연계하면서 정복지 웨일스를 효과적으로 통치 및 방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카나번성은 중세 축성술의 정수(精髓)를 담고 있는 동시에 중세 왕권이 어떻게 건축을 통해 권위를 정당화하고 피지배 지역을 통제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임이 분명하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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