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용하는 학문 용어와 일상어의 상당수는 개화기 일본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서구 학문을 이해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새롭게 만난 낯선 문물·개념을 명명하기 위해 일상이나 고전에서 그에 해당하는 말을 찾아내거나 아예 새롭게 어휘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개인, 존재, 자유, 권리와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학문 사상 개념은 물론 근대, 연애, 그와 그녀 등의 일상어도 이런 노력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말이다.
오늘날 동아시아 국가들의 학문 용어가 어느 정도 통일된 데는 한자문화권이란 요인도 있지만, 일본의 이런 선행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일본의 선행적 노력의 결과가 여러 동아시아 국가에 이식·정착돼 왔다.
이후 중국·한국 등 서구 문명 수용 후발국가들이 스스로의 안목으로 개념과 용어를 만들면서 국면이 좀 변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여전히 용어의 의미 전달에 무게를 두고 고전 속 어휘 선택이나 조어 방식을 택하는 중국과 달리 한국·일본은 대체로 원어 음가 그대로 표기하는 경향을 보인다. 플러스, 마이너스, 에너지, 컴퓨터, 알고리즘 등과 같은 말을 번역해 가(加), 감(減), 활력(活力), 계산기(計算機), 운산법칙(運算法則)처럼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원어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원어의 음가를 중시하면서 새삼 언어별 외래어를 표기하는 음가 재현 능력 차이가 드러나 보인다. ‘컴퓨터와 콘퓨-타-(コンピュ-タ-)’ ‘에너지와 에네루기(エネルギ)’ ‘알고리즘과 아루고리즈무(アルゴリズム)’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우리 한글과 일본 문자 가나의 재현 능력 차가 극명하게 비교된다.
원어를 살리는 데 필요한 글자 수부터 발음 유사도에서 크게 차이를 보여 새삼 우리 한글의 소리 재현 능력에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더 완벽한 외래어 표기 문자로서 한글의 진화에도 기대를 품어 본다. 상황을 아전인수해 한글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표현할 수 있다는 과도한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현재의 외래어 표기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는 개선하는 노력을 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싶다.
당장 일본의 가나에 비해 상당한 우위에 있음에도 우리말과 한글로는 여전히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발음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b와 v, p와 f, l과 r 음가 차이 등은 현재의 발음이나 표기법으로는 담아낼 수 없고 s와 sh, z와 j 및 d, t, th 등의 음가도 구분 표기에 어려움이 있다. 장단음을 표기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다행히 한글 창제 당시 이런 문제를 넘어설 내용이 담겨 있어 이를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b와 v 음가의 구분을 위해 ㅂ과 ㅸ을, p와 f 음가의 구분을 위해 ㅍ과 ㆄ을 활용할 수 있고 r과 l 음가의 표기도 ㄹ과 ㄹㄹ의 활용으로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겠다. 그 밖에 ‘ㅿ’이나 기타 복합 자음을 활용해 치음과 치조음의 다양한 음가 차이를 담아내고 ‘:’을 이용해 장음을 표현하는 것도 시도해 봄 직하다.
쉬운 일은 아니다. 말과 글이 함께 이뤄 온 고착된 관행을 깨기가 쉽지 않고,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도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자모로만 적는다”(제1장)고 규정하고 있어 옛 자모를 되살려 쓰는 일이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한결 개선된 외래어 표기 역량이 가져올 글로벌 적응력과 사용자 편의에 관한 생각이 희망의 끈를 놓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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