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나폴레옹의 라이프치히 전투 패배와 베르발트 교향시
가장 치열했던 라이프치히 전투서
동맹의 변심으로 프랑스군 큰 타격
나폴레옹 결국 폐위, 엘바섬에 유배
스웨덴 낭만주의 작곡가 베르발트
나팔·북 소리로 군대 행진 연상
긴박하거나 격정적 연출 아쉽지만
동맹국 군대 승리 교향시로 작곡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뒤 나폴레옹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베리아반도 및 러시아 원정에서 너무나 큰 희생과 패배를 당하자 프랑스 내부 권력층과 귀족 사이에서는 나폴레옹에 대한 불신임 기류가 확산됐다. 병력 보충을 위해 징집 범위를 확대하자 도시, 농촌 등 전국적으로 반대 움직임도 커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對)프랑스 동맹군은 나폴레옹 군대를 이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 다시 똘똘 뭉치기 시작해 그 규모가 프랑스군을 훨씬 넘어섰다. 이처럼 벼랑 끝 상황에서 동맹군과 프랑스군이 일전을 벌인 것이 바로 라이프치히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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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라이프치히에 감도는 전운
1813년 8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는데 베를린과 함부르크 지역 프랑스군은 동맹군에 패하면서 손실을 많이 입었다. 8월 26일에는 드레스덴에서 나폴레옹이 직접 동맹군과의 전투에 참전해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동맹군을 격퇴했다. 동맹군은 결국 현재 독일과 체코의 국경선까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손실도 5만 명에 달했다.
드레스덴 전투 뒤 프랑스군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우선 프랑스 본토로부터 병력 보충이 되지 않아 사상자와 포로 등 전투로 인한 손실을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또 약 300문의 대포를 잃었으나 교체할 장비가 없었다. 게다가 프로이센 지역 여러 왕국이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에서 이탈하는 상황이 확대됐다. 프랑스군은 25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반면 동맹군은 병력이 증강되고 협력이 강화된 가운데 라이프치히(독일의 중동부)로 집결하고 있었다.
프랑스 동맹의 배신이 만든 결정적 패배
10월 16~19일엔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가장 치열했다고 하는 라이프치히 전투가 펼쳐졌다. 당시 나폴레옹군은 약 19만 명이었지만 동맹군은 36만 명에 달했다. 동맹군은 거의 2배의 병력으로 라이프치히를 포위해 프랑스군을 공격해 왔다. 나폴레옹은 포위망을 차단하기 위해 방어와 공격을 거듭하며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10월 18일 프로이센 내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던 뷔르템베르크와 작센군 포대가 편을 바꿔 프랑스군에 포격을 시작하고 뷔르템베르크군 기병대도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상황이 발생해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철수를 위해서는 라이프치히 후방에 있는 엘스터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를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 수비병이 프로이센군이 나타나는 것에 겁을 먹고 다리를 일찍 폭파해버려 4만여 명이 다리를 못 건너고 꼼짝없이 동맹군에 당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4일간의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는 4만 명이 발생했고, 3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300문이 넘는 대포도 잃었다. 동맹군도 5만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813년 프로이센 지역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45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러시아 원정에서 발생한 손실과 이베리아반도 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모두 합치면 무려 100만 명에 달했다.
흔히 적군에 의한 기습보다 아군에 의한 기습이 더 치명적이라고 한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그랬다. 만약 뷔르템베르크와 작센군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엘스터강 다리가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폭파되지 않았다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결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결과가 우연히 발생했을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오랜 전투로 지칠대로 지친 프랑스군의 단면이었고, 기울어져 가는 나폴레옹 군대로부터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겠다는 판단의 결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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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랑스 동맹군의 파리 입성과 나폴레옹의 폐위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나폴레옹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특히 다시 전쟁을 준비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동맹군도 큰 손실을 입어 당장 전쟁을 재개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휴전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동맹국이 프랑스혁명 이전 상태로 돌려줄 것을 요구해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웰링턴 장군은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1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1813년 10월 이미 프랑스 국경을 넘어 북진하고 있었다.
휴전 논의가 결렬되자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로 진군했다. 1814년 1월에는 동맹국 군이 일제히 프랑스로 공격을 감행했고, 나폴레옹은 근위대를 포함해 모을 수 있는 병력을 다 끌어모아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탈영하는 병력이 늘어났고, 귀족·부르주아도 등을 돌려 쉽지 않았다.
결국 3월 30일 동맹국 군이 파리에 입성했고, 프랑스 원로원은 4월 4일 나폴레옹의 폐위를 의결했다. 나폴레옹은 잔여 병력을 모아 싸울 것을 주장했지만 참모들마저 항복을 권유했다. 마침내 4월 6일 나폴레옹은 퇴위했다. 그리고 1814년 5월 약 10년의 권좌에서 물러나 이탈리아반도 서쪽 엘바섬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스웨덴의 베르발트, 라이프치히 전투를 교향시에 담아
스웨덴의 낭만주의 작곡가 프란츠 베르발트(1796~1868)는 라이프치히 전투를 배경으로 1828년 ‘라이프치히 전투(Slaget vid Leipzig)’를 작곡했다. 국내에는 그다지 소개되지 않은 곡이다. 연주는 18분가량 이어지는데, 나팔과 북소리 등이 등장하고 군대 행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몇 번 연출된다.
스웨덴 작곡가가 라이프치히 전투를 다룬 것이 흥미롭게 보이겠지만 스웨덴 역시 동맹군의 일원으로 이 전투에 참여했다. 나폴레옹으로 인해 영토 일부를 빼앗긴 당시 스웨덴 왕은 나폴레옹에게 적대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몰락을 알리는 듯한 라이프치히 전투는 스웨덴에도 의미가 있었다. 다만 곡이 전투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긴박하거나 격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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