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그림 속 사계 -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오크 숲의 수도원’: 등돌린 남자가 마주한 초월적 세계
장엄한 자연 속 점 같은 인간
폐허가 된 수도원, 구원의 햇살
유한한 인간의 삶과 무한한 신의 존재 ‘절망과 희망’ 공존 그려
풍경화 공식 파괴…거리감 무시한 채 편평한 추상화처럼 표현
‘신과 조우하는 인간의 내면 깊이 성찰’ 19세기 獨 대표 작가로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들 사이에는 불문율이 있다. 시청자를 향해 등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특별한 의도가 있지 않는 이상 화면 속 인물은 시청자를 향한다.
출연자는 화면 밖에서 그를 바라보는 익명의 관객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 속 주인공은 관람객을 향해 얼굴을 든다. 관람객과 눈을 마주치지 않더라도,
옆모습을 보일지라도 뒤돌아 있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관람객을 외면한 채 뒷모습을 보인 한 사람이 있다. 모든 생명체를 집어삼킬 듯한 검은 바다와 광활한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사람.
압도적인 풍경에 인물은 자연스레 묻혀 있다. 19세기 독일 화가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그린 ‘바닷가의 수도사(The Monk by the Sea·1808~1810)’다.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오크 숲의 수도원(The Abbey in the Oakwood·1809~1810)’도 마찬가지. 이번엔 바다가 아니라 숲이다. 그것도 칠흑같이 어두운 숲이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숲을 더듬으며 걷는 것처럼 지평선 아래로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화면 아래 어둠에 갇힌 한 무리의 사람들은 가까이 들여다봐야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발목까지 오는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산속 나무와 다름없다.
두 작품 ‘바닷가의 수도사’와 ‘오크 숲의 수도원’은 1810년 베를린 아카데미 전시에 나란히 출품됐다. 이 두 작품은 당시 관객에게 상당히 낯선 그림이었다. 19세기만 해도 자연을 그린 풍경화에는 삼단 공식이 있었다. 캔버스를 아래에서부터 세 부분으로 나눠 전경, 중경, 후경을 그리는 방식이다.
맨 앞에 있는 전경에는 주로 잔잔한 풀과 바위를 세밀하게 그리고 화면 끝에 키 큰 나무를 그려 안정감을 줬다. 중경에는 넓게 펼쳐진 들판, 흐르는 강물로 중심을 잡고 후경에는 먼 산이나 하늘을 배경처럼 옅게 그렸다. 프리드리히는 오랫동안 이어진 풍경화의 공식을 깼다. 그는 기존 그림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중경을 없애거나 비중을 상당히 줄였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전경과 후경만으로 채워졌다. 낯선 방식에 대해 프리드리히의 친구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이렇게 썼다. ‘마치 눈꺼풀이 잘린 것 같은 그림이다.’ 심지어 배경 역할을 하는 후경 비중을 대폭 늘려 ‘바닷가의 수도사’에서는 청회색의 하늘이, ‘오크 숲의 수도원’에서는 황금빛으로 물든 하늘이 무한하게 펼쳐진다.
프리드리히의 하늘에는 또 다른 예술적 ‘특이점’이 있다. 기존의 풍경화는 원근법의 질서를 따랐다. 가까이 있는 것은 크고 선명하게, 멀리 있는 것은 작고 흐리게 그리는 방식이다. 원근법을 따른 풍경화는 그림에 깊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경과 후경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프리드리히의 작품에서 후경에 그려진 하늘은 넓게 펼쳐져 있지만 깊지 않다. ‘오크 숲의 수도원’을 보더라도 폐허가 된 수도원 앞을 지나가는 수도사 무리와 하늘로 뻗은 오크나무의 거리가 가까운지 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바닷가의 수도승’에서 검은 바다, 먹빛 하늘, 청회색의 안개, 맑은 푸른색 하늘이 층층이 쌓여 멀리서 보면 편평한 색면 추상화처럼 보인다.
프리드리히의 두 작품 속 자연은 단순히 바다와 숲이 아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리드리히가 낯선 방식으로 그린 자연은 우리가 눈으로 감상하는 풍경이 아니라 신성하고 초월적인 존재 그 자체다. 자연으로 그려진 무한한 신의 존재 앞에서 인간은 미미할 뿐 아니라 죽음을 경험한다. 장엄한 바다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수도사는 지상의 삶에서 신과 마주한다.
‘오크 숲의 수도원’은 반대로 죽음 이후의 삶을 다룬다. 수도사들은 장례 미사를 거행하기 위해 폐허가 된 수도원으로 관을 나른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평선 위로 밝아오는 광채는 영원한 삶을 묘사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유한한 인간의 삶과 무한한 신의 존재, 죽음과 삶,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언젠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인간은 종종 죽음에 자신을 맡겨야만 한다”고 한 프리드리히의 말은 그의 작품에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바닷가의 수도사’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수도사는 그림 밖의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다. 관람객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든,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다. 수도사는 자기 앞에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앞에 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수도사는 관객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관객이 이 그림으로 접근하는 안내 역할을 한다. 그림 밖의 관객에게 숙고의 시간을 제안한다. 프리드리히는 ‘정신적인 눈’으로 그의 작품을 보길 바랐다. “육체적인 눈을 감으라. 그러면 당신은 정신의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프리드리히가 세상을 떠난 1840년 이후 한동안 미술계는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히틀러가 총애하는 예술가’라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프리드리히의 풍경을 독일 민족의 땅과 정신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간주하며 나치즘의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 프랑스 인상주의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그와 다른 스타일의 프리드리히 작품이 자연스레 관심 밖으로 물러났다. 한동안 잊혔던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1970년대 들어 베를린국립미술관에 의해 재발굴되며 가치를 인정받았다. 신과 조우하는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이제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