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는 자유롭지만 표현은 보호된다

입력 2025. 11. 11   14:13
업데이트 2025. 11. 1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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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언철 법무법인 대화 변호사
심언철 법무법인 대화 변호사

 


2001년 MBC 드라마 ‘여우와 솜사탕’이 방영되자 김수현 작가는 자신의 1992년작 히트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베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여우와 솜사탕’의 저작권 침해를 인정했고 손해배상 판결을 했다.

20여 년 뒤 영화 ‘명량’을 상대로 KBS가 제기한 소송에서는 반대 결론이 나왔다. KBS는 자신들이 제작한 교양 프로그램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거북선 디자인 등 창작적 구성을 영화가 무단 사용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침해를 부정했다. 두 저작권 분쟁의 결과는 왜 달랐을까. 그 해답은 ‘아이디어와 표현의 이분법 이론’에 있다.

저작권법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창작적으로 표현한 형식’을 보호한다. 그러나 그 표현에 담긴 아이디어 자체는 보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첫사랑과의 재회’라는 아이디어에 저작권을 인정한다면, 이후 누구도 첫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법은 ‘무엇을 표현할지’는 자유롭게 두되 ‘어떻게 표현했는가’만 보호한다.

법원은 표절 여부, 즉 저작물의 유사성을 판단할 때 두 가지를 본다. 하나는 ‘포괄적 유사성’, 작품 전체의 구성과 전개가 닮은 경우다. 다른 하나는 ‘부분적 유사성’, 특정 대사나 장면 등 구체적 표현이 동일한 경우다.

가령 전쟁영화에서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거나 멜로 드라마에서 연인이 사랑을 확인하며 키스하는 장면은 거의 필수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장르 특성상 누구나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전형적 장면을 법은 ‘필수장면’이라고 부른다. 또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이를테면 영웅이 폭발에도 무사히 걸어나오는 장면) 역시 창작자의 독창적 표현이라기보다 장르의 습관에 가깝다. 이런 표현까지 보호하면 창작의 공통언어가 사라지게 된다. 결국 법은 ‘누구나 사용할 수밖에 없는 표현’과 ‘창작자의 개성이 드러난 표현’을 가르고, 오직 후자만 보호한다.

‘여우와 솜사탕’ ‘사랑이 뭐길래’는 모두 가족 간 갈등과 화해를 다뤘다. 그러나 법원은 단순한 소재의 공통점이 아니라 줄거리 전개, 인물 구도, 갈등 구조와 해소방식이 구체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여우와 솜사탕’의 대본이 원작인 ‘사랑이 뭐길래’의 구체적인 표현을 실질적으로 복제했다고 본 것이다.

반면 ‘명량’ 사건에서 자신들이 복원한 거북선 디자인을 영화가 모방했다는 KBS의 주장에 법원은 “도깨비 머리장식이나 적선 돌진 장면 등은 역사적 사실 해석 또는 해전 장면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아이디어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전투 장면 구성, 인물 배치, 대사 전개 등에서도 창작적 표현의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였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이나 전형적 연출은 보호받지 않는다. 이는 창작 영역이 아니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공의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실질적 유사성은 창작적인 표현 형식에 한정해 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뜻하는 바는 저작권법이 지키려는 것은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이용’과 ‘표현의 정당한 보호’ 사이의 균형이라는 원칙이다.

아이디어까지 독점하면 창작의 문이 닫히고, 표현까지 자유롭게 복제하면 창작자의 노력이 무너진다. 그 경계를 가르는 세밀한 판단 속에서 창작의 자유와 문화의 다양성이 함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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