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혁명가 그 천의 얼굴의 보고

입력 2025. 11. 06   16:32
업데이트 2025. 11. 0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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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Artist Studio 26.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사물 기하학적 분해·재구성 반복…미술 패러다임 전환시킨 주인공
예술가 생애 대부분 활동…상속세 대신 기증한 작품 영구 보존·전시 
5000점 넘는 작품·아카이브 소장…피카소 예술 변천사 한눈에

파리 마레(Marais)지구는 고풍스러운 중세 골목과 17세기 귀족 저택들이 잘 보존된 역사적인 지역이다. 동시에 패션 부티크와 편집숍, 현대미술 갤러리와 유럽사진미술관, 국립문서보관소 등 많은 문화예술공간이 있어 파리의 과거와 현대 문화 예술이 공존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은 마레지구에서도 손꼽히는 명소다. 이곳은 현대 미술의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전 생애 작품과 화풍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다.

피카소가 다양한 기법과 스타일로 탐구했던 여성 초상화들. 필자 제공
피카소가 다양한 기법과 스타일로 탐구했던 여성 초상화들. 필자 제공

 
미술관의 설립 배경, 상속세 물납제

피카소는 스페인 출신의 작가인데 그에 관한 최대 규모 미술관이 파리에 있다고? 다소 의아할 수 있다. 이 미술관의 설립 배경에는 ‘물납제(Dation en paiement)’라는 상속 제도가 있다. 피카소는 예술가로서의 생애 대부분, 특히 청년기와 입체주의 탄생 시기에 파리에서 활동하며 보냈다. 1973년 그가 프랑스에서 사망했을 때 작품 5000여 점을 포함해 엄청난 양의 재산을 남겼다. 따라서 상속인들은 프랑스 정부에 막대한 상속세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1968년 도입된 물납제를 적용해 현금이 아닌 ‘국가적으로 중요한 예술 작품’으로 상속세를 대신 납부하도록 했다. 그 결과 방대한 양의 피카소 작품을 기증받은 프랑스 정부는 이를 한곳에 모아 영구적으로 보관, 전시하기 위해 1985년 마레지구에 미술관을 개관했다. 이 미술관은 이런 제도적 이면 외에 한 예술가의 생애를 아우르는 작품을 정부가 소장하고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측면에서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곳이다.

피카소미술관이 자리 잡은 ‘오텔 살레’는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건축물로 화려한 정면과 섬세한 조각 장식 등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1650년대 바로크 건축물이다.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예술가인 피카소의 파격적인 작품들이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적인 건물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오텔 살레를 피카소미술관으로 개조할 때 건축물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피카소의 현대적인 작품 사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디에고 자코메티에게 조명·의자 등의 디자인을 의뢰했다. 디에고의 청동 및 구리 조명 장식들은 고전적 건축 공간과 피카소 작품 사이에서 조화로운 균형감을 이끌어내 미술관의 관람 포인트 중 하나로 꼽힌다.


피카소미술관에 전시된 피카소의 1930년대 조각 작품. 필자제공.
피카소미술관에 전시된 피카소의 1930년대 조각 작품. 필자제공.


20세기 미술의 창시자, 보는 방식을 전환하다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혁명가로 평가된다. 그는 91년의 긴 생애 동안 끊임없는 양식의 변화를 추구한 혁신가이자 3만여 점의 작품을 남긴 다작의 상징으로 회화, 조각, 도자기, 판화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작품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피카소의 예술적 여정은 우울과 가난을 주제로 한 ‘청색 시대’와 서커스·곡예사 등을 주제로 삼은 ‘장밋빛 시대’를 거쳐 1907년 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바탕으로 탄생한 입체주의(Cubism)로 대표된다. 그는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사물을 해체하고 다양한 시점을 통합함으로써 입체주의라는 회화의 시공간 개념을 확장시킨 변화를 추동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서양 미술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를 거치며 빛과 색채의 실험을 진행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피카소는 ‘자연의 모든 것은 원통, 구, 원뿔로 환원될 수 있다’는 폴 세잔의 조형 원리에 주목했다. 동시에 당시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하던 비서구권 문화(원시 미술)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며 아프리카 가면이나 이베리아 조각 같은 이질적인 미술에서 형태의 단순함과 강렬한 표현력을 발견했다. 피카소는 대상을 삼각형, 사각형, 원뿔 등의 기본 기하학적 형태로 분해한 뒤 새로운 논리로 재구성했다. 그 결과 화면 내 3차원의 공간감이 사라지고 평면화됐으며, 보는 이가 대상의 모든 면(순간)을 한 번에 인식하도록 동시적 시점을 제시했다. 이렇게 입체주의는 르네상스 이래 서양 회화의 근간이었던 원근법과 재현의 전통을 무너뜨렸고, 이는 이후 추상 미술과 현대 조각, 디자인 분야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 작품 세계의 보고,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파리 피카소미술관은 5000점 이상의 작품은 물론 피카소의 연인·가족의 초상, 사진, 편지, 노트 등 수만 점의 아카이브 자료를 소장한 곳이다. 이 방대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피카소의 예술 변천사를 연대기처럼 살펴볼 수 있다. 관람객은 피카소의 초기 청색 시대 우울한 감성, 장밋빛 시대의 서커스 모티브, 입체주의의 형태 해체, 고전주의로의 회귀, 초현실주의와의 만남, 말년의 격렬한 창작 활동까지 모든 시기의 대표작을 볼 수 있다. 또 회화에 국한되지 않고 조각, 도예, 드로잉, 판화 등 피카소가 다뤘던 다양한 매체 작품을 통해 그의 전방위적인 예술가적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피카소의 끊임없는 스타일 변화와 재창조를 공간적으로 보여준다. 관람객은 층 또는 전시실을 이동할 때마다 극적으로 달라지는 작가의 화풍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피카소가 평생에 걸쳐 새로운 스타일을 창립하고 또 스스로 그것을 파괴하며 새로움을 창조해 왔는지를 살피는 과정이다. 이 미술관은 피카소라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젖힌 예술가정신을 연구하고, 이를 가장 완벽히 보여주는 미술사 교과서 같은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La peinture est plus forte que moi elle me fait faire ce qu’elle veut. 1963.3.27. (그림은 나보다 강하다. 그것은 나에게 그것이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든다.)

미술관 한쪽 벽면에는 스타일이 다른 두 점의 자화상과 함께 자필로 쓰여진 위 문구가 기록돼 있다. 80대에 이르러서도 엄청난 작업량으로 끊임없는 형식과 매체 실험을 이어간 노작가의 불꽃 같은 열정의 근원은 결국 그림의 본질적인 힘이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통해 전통적인 재현 방식과 원근법을 파괴하며 20세기 미술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혁신가다. 그는 회화, 조각, 판화, 무대미술 등 거의 모든 시각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예술의 언어를 새롭게 쓴 인물이다. 피카소의 작업은 형태의 실험이자 감정의 기록으로 인간의 욕망, 폭력, 유희를 동시에 담아낸 시각적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인상주의 이후 예술이 더 이상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사유의 창조’가 됐음을 가장 강력하게 증명한 작가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란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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