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런던탑 - 정복왕 윌리엄, 지배를 과시하다
잉글랜드 왕위 빼앗은 노르만 정복인
앵글로색슨족에 대한 지배력 키우려
선진 축성술로 세운 웅장한 석재 요새
중세 말 감옥 활용 한때 ‘죽음’의 상징
헨리 8세 왕비 앤 불린 안뜰서 처형돼
지금은 왕실 왕관·보석 등 보관·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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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수도답게 영국 런던은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하다. 이 가운데 런던 동부지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는 흔히 런던탑(Tower of London)을 꼽는다. 템스강 유람선에서 바라본 런던탑 전경은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웅장한 외관은 물론이고 탑 내부 곳곳에 숨겨진 다양한 역사 속 얘깃거리로 인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발걸음을 잡아당기고 있다.
이 탑은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통치기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잉글랜드에 있던 성곽은 대부분 목조 건물인 데 비해 런던탑은 유럽 대륙의 선진 축성술을 적용해 석재로 지어졌다. 이후 증축을 통해 완성된 런던탑은 오늘날 중세 성곽 건축의 살아 있는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윌리엄은 왜 런던 동쪽에 이처럼 거대한 성채를 세우고자 했을까? 그는 1066년 가을 헤이스팅스 전투 승리를 발판 삼아 그해 성탄절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후 그는 압도적 다수인 앵글로색슨족 피정복민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할 의도로 다각적인 조치를 단행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런던탑 건설이었다.
외국인 정복자였던 윌리엄은 기존 잉글랜드 지배층인 앵글로색슨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에게조차도 낯선 존재였다. 당연히 그의 통치는 초기부터 반발과 저항에 부딪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 런던 한복판의 템스강가에 우뚝 솟은 이 석조 요새는 단순한 방어시설을 넘어 윌리엄의 권위와 통치가 절대적임을 과시하는 물적 증거였다. 이는 단순한 국방 차원의 요새 축성을 넘어 당시 잉글랜드 사회 실상을 고려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런던탑은 노르만 왕조의 잉글랜드 정복과 지배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시각적 상징물이다.
무엇보다도 성채 축성의 직접적이며 현실적인 요인은 군사적 필요성에 있었다. 즉 잉글랜드 피정복민의 반란을 억제하고 수도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잉글랜드 최대 도시이자 경제적 중심지였던 런던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심장 지대를 확고하게 장악 및 통제하기 위해 일종의 핵심 군사 거점으로서 런던에 요새를 건설하는 일은 절실했다. 런던탑은 외곽을 높은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 방어력을 크게 높였다. 내부에는 일정 규모의 병력이 상시 주둔할 수 있는 시설까지 갖췄다. 런던탑 덕분에 노르만 정복자들은 템스강 물길을 따라 런던으로 진입하는 침략자를 감시·대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런던탑은 어떻게 축조됐을까? 1067년경 윌리엄은 런던 동부의 템스강변에 방어요새 건설을 지시했다. 장소로 선정된 곳은 이미 로마 시대 성벽 잔해가 있던 고래(古來)의 요충지였다. 처음에는 임시로 목조 요새를 설치했으나 1078년경 런던탑의 중심인 화이트타워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채 공사가 시작됐다. 노르망디 출신의 사제이자 당시 성채 건축가로 명성이 높던 군돌프란 인물이 윌리엄의 명을 받아 공사를 총감독했다. 이후 런던탑이 전체 모습을 갖추는 데 길게는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윌리엄 사후에도 후대 왕들에 의해 확장, 보강돼 오늘날의 외관을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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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탑은 단일한 탑이 아니라 중앙의 화이트타워를 중심으로 다층적 방어체계를 갖춘 일종의 복합 성채다. 처음에는 단순한 형태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다른 구조물이 추가돼 거대한 군사시설 및 왕실용 거주지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중심은 변함없이 높이 약 27m, 벽두께 최대 4.5m에 달한 거대한 석조 건물이자 중세 로마네스크 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화이트타워다. 정방형의 외관을 지닌 탑의 내부는 3개 층으로 이뤄져 있는데, 층마다 그 기능이 달랐다. 지하층에는 식량저장소와 무기고를, 1층에는 병영과 행정 공간을, 2층에는 왕실의 거처와 예배당(성요한 채플)을 뒀다.
런던탑이 수도 런던의 동부를 방어하는 대표적 군사시설임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웅장한 외곽 방어시설에 있었다. 탑은 내성벽과 외성벽, 그리고 성벽 외곽을 감싸며 템스강 수로와 연결된 해자(垓字) 등 3중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실상 이러한 완성도는 화이트타워가 건설된 이래 12~13세기를 거치면서 요새가 점차 확장된 결과였다. 특히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시기에 내외부 성벽, 해자, 그리고 다른 탑들이 추가되며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화이트타워를 중심으로 주변에 블러디 타워, 웨이크필드 타워, 보차드 타워 등 여러 개의 다른 탑이 추가돼 방어력은 더욱 강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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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말경부터 런던탑은 주로 감옥으로 활용됐다. 특히 정치·종교적 혼란기였던 튜더 왕조와 종교개혁 시기 정치범이나 반역죄로 기소된 귀족과 왕족이 대거 투옥됐다. ‘런던탑에 감금된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경고로 여겨질 정도로 공포의 상징이 됐다. 특히 영국 역대 국왕 가운데 최대 풍운아인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이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모친인 앤 불린의 슬픈 사연이 있다. 불린은 간통·반역 혐의로 체포돼 런던탑에 투옥됐다가 1536년 탑 안뜰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처럼 성 내부에서 벌어진 수많은 비극과 투쟁, 음모와 처형의 이야기는 런던탑을 단순한 요새가 아니라 ‘음습한’ 권력투쟁의 상징 공간으로 만들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런던탑의 감옥 기능은 폐지됐다. 그 대신 역사적 기념물로 보존되기 시작해 19세기 말 빅토리아 여왕 시기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물론 1차 세계대전 중 독일 간첩 혐의로 체포된 11명이 총살됐고,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처형 장소로 활용됐다. 또 히틀러의 최측근이던 루돌프 헤스가 수감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내성벽을 기준으로 총면적 12에이커(약 4만8500㎡)에 달하는 런던탑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 관광지가 됐다. 특히 화이트타워 안 무기박물관의 각종 전통 무기류와 탑 내부 지하실에 보관·전시된 영국 왕실의 왕관 등 값진 보석들은 방문객의 눈길을 한 번에 사로잡고 있다.
런던탑은 단순한 방어용 건축물이 아니라 정복왕 윌리엄의 통치 이후 전개된 영국 왕실과 지배계급의 피로 물든 역사를 생생하게 품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원래 축성 의도대로 외적의 침략을 막는 데 활용되기보다 오히려 그 안에서 벌어진 수많은 비극과 투쟁, 음모와 처형 등에 얽힌 서사로 가득하기에 방문객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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