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 없는 무기, 통역-동맹을 지탱하는 언어의 힘

입력 2025. 11. 04   16:48
업데이트 2025. 11. 0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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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영 육군대위(진) 합동참모본부 군사지원본부
고대영 육군대위(진) 합동참모본부 군사지원본부



전장은 총과 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연합·합동작전 시대 탄약과 병력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언어’다. 적을 향한 포성이 울리기 전 동맹국 사이의 명확한 이해와 신뢰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어떤 작전도 성공할 수 없다. 통역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기이자 전장을 지탱하는 숨은 전사다. 

합동참모본부의 통역장교로 근무하며 연합연습 및 공조회의에 여러 번 동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통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작전 흐름은 어긋나고 협력이 느슨해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 문장의 뉘앙스 차이, 용어 하나의 차이가 현장 분위기·집중력·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총알 한 발, 포탄 한 발보다 무거운 게 바로 그 순간의 한마디 통역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면 한미 연합연습 공조회의 때 기존 계획이 충분히 유효하다고 한국 측이 판단하고 있음에도 미국 측이 수정안을 제시했던 적이 있었다. 이후 양측이 나름의 타당한 이유를 근거로 추가적인 논의를 계속했으며 약간의 긴장감도 있었다.

현장 통역장교로서 당시 역할은 단순한 언어 전달이 아니었다. 우리 측 입장을 명확하고 단호하게, 그러나 회의의 격을 해치지 않도록 전달해야 했다. 표현과 어조를 신중하게 선택해 기존 계획의 타당성을 강조하고 불필요한 변경이 가져올 위험을 정확히 옮기고자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측은 우리 입장을 이해하고 수정안 재검토를 약속했으며 회의는 원활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이 경험은 통역이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기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 줬다. 통역은 상대 의도와 맥락을 읽고, 상황과 흐름에 맞게 조율하는 종합적인 임무다.

연합 개념은 결국 동맹국 사이의 이해와 신뢰 위에 세워지며, 그 바탕엔 언제나 통역이 있다. 우호와 친선을 다지는 자리에서는 세심한 배려와 재치가 필요하며, 국가 이익과 직결되는 상황에선 단호하고 명확한 전달로 우리 입장을 확실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연습이 끝나고 돌아보면 통역은 눈에 띄지 않는 임무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장에선 계획과 명령, 실행의 흐름 속에서 전투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 총과 포가 전투에서 승리를 만든다면 통역은 그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신뢰와 협력을 이뤄 내는 힘이다.

통역장교는 총으로 싸우지 않는다. 전장의 중심에서 동맹이 하나로 움직이도록 돕는 보이지 않는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언어장벽을 허물고, 작전과 훈련 흐름을 지키는 임무야말로 통역장교가 지닌 가장 중요한 전투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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