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스포츠 관람의 묘미는 극적인 반전에 있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반인반귀의 결함을 극복해 낸 주인공의 장렬한 최후, 메이저리그 최종전의 연장전 결승타처럼 팽팽한 긴장을 일거에 허무는 반전의 요체는 전율과 연민을 일으키는 새로운 사건의 등장이다. 결정적 한 방이 그간의 긴장을 풀어 주는 계기가 되면서 관객의 희비가 갈리고, 주인공에게 애증의 갈채가 이어진다. 반전의 순간은 나름의 정제된 방식으로 주어진다. 드라마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문예비평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반전을 품은 플롯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드라마에서 연민과 전율의 감정을 느끼도록 스토리를 극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핵심에 반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로 비극에 주목했기에 반전은 대개 행복에서 불행으로 이어지는데, 거기엔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중대한 ‘결함(Hamartia)’이 잠복해 있다. ‘케데헌’의 반인반귀나 야구 경기의 결정력 부족 등 숨은 결함이 주인공의 끈질긴 노력 또는 운명적 만남으로 반전 폭발함으로써 관객의 긴장을 풀고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나 아가멤논 가문의 뒤죽박죽 운명을 배경으로 한 고대 그리스의 가족 비극이 그랬고, 현대의 인기 막장 드라마도 다르지 않다.
스포츠 경기에서의 반전은 플롯 초월적으로 돌발적이고 느닷없이 나타난다. 예비된 ‘결함’이 아닌 돌발사건이 주는 신선함이 곧 스포츠 관람의 묘미이긴 하지만, 때로 예측하지 못한 실수라는 ‘결함’이 패배를 가져옴으로써 자책 당사자는 물론 응원하던 관객에게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을 준다. 각본으로 준비할 수 없었던 그 숨은 ‘결함’이 무엇이든 간에 개인과 팀 관련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반성과 성찰의 사후약방문이 난무한다. 스포츠가 보여 주는 반전의 카타르시스다.
대화와 타협의 장이라고 하는 정치판에서도 극적 반전이 나타나 연민과 놀라움을 제공한다. 과도한 정치적 욕심으로 위법·탈법을 저지르거나 과거의 숨겨진 비리가 드러나 곤궁에 처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그렇다. 드라마나 스포츠의 경우와 다른 점은 반전의 원인으로서 자체 ‘결함’ 분석이나 인정이 드물다는 점이다.
오히려 관행이나 환경 또는 주변 인물 탓으로 돌리며 면피를 꾀한다. 해명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인정이나 사과가 더해지면 치명적인 약점이 돼 스포츠 경기의 자책골과 같은 부담을 안게 될 것이기에 아무것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 반전 거부의 정치문화도 자리 잡는다. 그런 탓인지 현실정치는 대개 파괴적 자멸과 어수선한 어부지리 수확이라는 짝퉁 반전만 되풀이되는 듯하다.
열심히 준비한 실력을 발휘하며 치열하게 상대와 겨루는 스포츠 경기가 보기에 좋듯이 정치도 각자 준비한 진단과 비전을 내세우고 이것을 유권자들이 선택하도록 선의의 경쟁을 하면 좋겠다. 자책 위험이 있는 공격에 나서기보다 상대 실수를 유도하는 변칙 방어에 전념해야 반전의 계기는 물론 도약의 기회도 잡을 수 없다. 위풍당당한 정면승부를 기대하는 관객이 실망의 야유를 보내는 까닭이다.
드라마와 스포츠, 인생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고 작은 실수를 이겨 나가면 언젠가 생산적 반전의 계기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목표를 향해 진정성을 갖고 노력과 정성을 다하면 크고 작은 실패의 경험도 결국 반전 성공의 디딤돌이 된다. 과실과 결함이 해소되면서 주어지는 반전의 카타르시스는 지금의 좌절을 견디고 다시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 내는 힘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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