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인공 루미는 같은 헌트릭스 멤버 미나와 조이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지낸다. 그렇게 거리를 두는 이유는 단순히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자신이 악령으로 규정될까 두려워서다. 그 불안은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정체를 받아들이기 싫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도 종종 비슷한 방식을 택한다. 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 조절하고, 완전히 숨기진 않지만 또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사회적인 거리감을 유지한다.
루미의 정체는 처음부터 주어져 있었으나 스스로 인정하기 전까지 그 정체를 짐처럼 느낀다.
해병대도 마찬가지다. 신병 교육을 마치고 임관과 동시에 ‘빨간 명찰’을 받아 외적으로는 해병대원이 됐지만 ‘빨간 명찰’이 그 사람을 진정한 해병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팔각모와 해병대 전투복·전투화와 같은 복장을 착용하고 있지만 태도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진짜 정체성은 타인이 불러 주는 호칭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내리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루미는 자신의 정체를 더 이상 부정하지 않기로 한다. 그 고백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조용한 수락에 가깝다. 그 순간 숨기던 이름은 짐이 아니라 방향이 된다.
해병대 역시 마찬가지다. 해병다움은 남들이 평가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나는 해병답게 살겠다’는 내면의 다짐이 쌓여 만들어진다.
해병대의 핵심 가치인 ‘충성, 명예, 도전’은 교육시간에 암기하는 단어나 가치가 아니라 각자가 매일매일 선택 속에서 다시 확인하고 선택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루미는 정체를 고백한 순간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단해졌다. 자신을 감추던 거리감은 사라지고, 비로소 자신의 자리 위에 선 한 사람으로 존재하게 됐다. 정체성을 숨기며 사는 인생은 사람 무리에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정체성을 선택하며 사는 삶은 당당하고 멋지며 사람들에게 기억돼 흔적을 남기게 된다.
“해병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는 말에서 만들어진다는 건 단순한 ‘빨간 명찰’을 단다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해병다움을 선택하고 해병대의 핵심 가치를 행동 기준으로 삼아 실천하면서 쌓여 만들어진다는 뜻일 것이다.
정체성은 우리를 묶는 굴레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리해 주는 기준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루미가 보여 줬고, 이제 우리 해병대도 보여 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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