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세계 속 독립운동 운동 거점 ⑨ 유럽·러시아
대한민국임시정부·애국지사들
일제 만행 알리며 독립 지지 호소
헤이그 특사 이준 머나먼 길 거쳐
숙소 도착하자 태극기부터 걸어
외교권 박탈로 순국했지만
그 뜻 기린 흉상·기념비 남아
독립을 위한 노력은 멀리 유럽과 러시아에서도 활발히 전개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애국지사들은 러시아 연해주는 물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일제의 만행을 알리며 우리 독립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광복 80주년 연중기획 세계 속 독립운동 거점, 이번 시간에는 유럽과 러시아 일대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소개한다. 서현우 기자/사진·도움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개최지
이상설·이위종·이준 등 3명의 특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1907년 6월 25일로, 이들이 이곳에 왔을 때는 만국평화회의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이들의 만국평화회의 본회의 참석은 봉쇄당했다. 회의가 열린 곳은 헤이그 빈넨호프왕궁의 기사홀이다. 이 건물은 단층의 석조건물로 내부가 홀로 돼 있다. 건물 정면에서 볼 때 좌우 양쪽에 기둥형 첨탑이 솟아 있고, 그 중앙에 삼각형 모양으로 지붕이 건축돼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 이준 순국지(이준 열사 기념관)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은 1907년 4월 21일 단신으로 사행길(사신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는 길)에 올랐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해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주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합류했다. 이들은 독일 베를린을 경유해 6월 25일 헤이그에 안착했고, 헤이그 시내에 있는 융호텔에서 묵으며 숙소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이어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고, 불법적인 행위를 고발했다.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에서 외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이준은 7월 14일 순국했다. 1995년 8월 5일 현지에 이준 열사 기념관이 개관해 한국특사의 활동을 전시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신한청년단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김규식은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아울러 미국에서 황기환, 중국에서 조소앙, 스위스에서 이관용 등이 잇달아 파리에 왔다. 이들은 김규식을 보좌해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단을 구성했다. 파리위원부는 여러 외교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920년 5월부터 유럽지역에 한국의 독립을 선전하기 위해 ‘자유한국’을 매달 1000부씩 발간했다. 이를 통해 우리 독립운동 관련 활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상을 소개했다.
프랑스 파리 조소앙 외교활동지
조소앙은 1919년 8월 1~9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했고, 대회에 제출한 ‘한국독립승인요구서’가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조소앙은 이때 체결된 결의문 사본을 국제연맹 이사회 의장에게 발송했다. 이후 조소앙은 파리로 건너가 외교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때 머물던 곳이 아테네호텔이다. 이곳은 1972년까지 아테네호텔로 운영되다가 이후 이름이 바뀌었다.
영국 런던 이한응 순국지
주영국 한국공사관 건물로 서리공사 이한응이 1905년 순국한 곳이다. 이한응은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임명됐다. 1901년 영국 런던에 부임해 1904년 서리공사가 됐다. 일제의 강요로 주영 공사관은 1905년 5월 폐쇄됐다. 이에 이한응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5월 12일 순국했다. 순국지는 이 공사관 건물로 추정된다.
영국 런던 한국친우회 결성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런던 주재 외교원으로 임명된 황기환이 조직한 한국친우회 결성지다. 황기환은 친한(親韓) 인사였던 캐나다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와 협의해 1920년 10월 26일 영국 하원 의회 6호실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했다. 발족회의는 R. 뉴먼 영국 하원의원의 사회로 진행됐고, 황기환과 매켄지가 연설했다. 또한 한국 독립운동 후원을 목적으로 하는 4개 항의 결의안이 채택했다. 황기환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 역의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독일 베를린 재독한인회 사무실
독일에 거주하던 한인들의 조직이자 일제의 관동대학살을 규탄했던 재독한인회의 사무실이다. 한인들은 1923년 10월 베를린에서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했는데, 관동대지진 때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세계 각국에 알릴 목적이었다. 당시 선전문에는 한국의 독립된 역사 전통과 이를 침해한 일제의 침략, 관동대지진으로 나타난 일제의 한인 학살 등을 기록했다. 대회에서는 일제의 한국 지배를 비난하고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서도 발표했다.
독일 포츠담 한인구락부 터
독일 포츠담시에 거주했던 한인들이 조직한 한인구락부가 활동했던 곳이다. 한인구락부는 베를린 외곽 포츠담시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독립운동 단체다. 일제의 만행을 세계 각국에 알릴 목적으로 1923년 10월 베를린에서 ‘재독한인대회’가 열렸을 때 주도적 역할을 한 단체가 포츠담 한인구락부였다. 포츠담 한인구락부는 한인 학생들이 주요 회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벨기에 브뤼셀 만국평화대회 개최지
서영해 등이 만국평화대회에 참가해 한국 독립운동을 선전했던 곳이다. 1936년 9월 3~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1회 만국평화대회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고려통신사 대표 서영해가 참석했다. 그는 각국 대표들을 일일이 찾아 우리의 사정과 독립운동을 널리 선전했다. 만국평화대회가 개최된 곳은 이후 브뤼셀박람회관으로 바뀌었다.
이탈리아 밀라노 파리위원부 활동지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서 국제연맹에 한국위원회를 파견해 외교활동을 벌였던 곳이다. 1920년 10월 12~16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국제연맹 사회단체연합회 제4차 대회에 윤해, 이관용이 파견됐다. 임시정부 파리위원회는 ‘국제연맹 한국위원회’ 이름으로 이들을 보냈다. 이들은 한국 독립과 국제연맹 가입을 위해 청원서를 만들어 대회 의장에게 전달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이듬해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같은 대회에서 한국 문제가 토의됐다.
러시아 모스크바 이승만 숙박지
이승만이 소련 정부에 독립운동을 도와줄 것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하기 위해 1933년 7월 머물렀던 곳이다. 당시 이승만은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 외교활동을 펼쳤지만 한국 문제에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자 실망했다. 그 무렵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에 우려를 나타내자 소련행을 결심했다. 소련 입국 비자를 받고 1933년 7월 18일 모스크바에 도착했지만 바로 소련 외무부로부터 출국 명령을 받았다. 모스크바에 있던 일본협상단의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범진 묘
주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은 고종이 헤이그에 이준·이상설을 보내 구국외교를 펼치려 하자 헤이그 특사 파견을 준비했다. 또 홍범도, 이상설, 최재형 등이 연해주 독립운동을 주도할 때 연해주 한인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앞서 주미 공사를 지내면서는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고종의 국서를 전달했다. 19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했다.
이범진의 유해는 같은 해 2월 3일 우스펜스키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1958년 우스펜스키 공동묘지가 북방 공동묘지로 재편되면서 이범진의 묘역도 소실됐다. 우리 정부는 2007년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순국비를 세웠다.
순국비에는 한글과 러시아어로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 3일 한국 서울에서 탄생해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다”고 써 있다.
|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안중근 단지동맹비
안중근은 1908년 7월 동의회(同義會)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국내진공작전에 참가했다.
이후 하(下)연추(얀치혜)에서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백규삼, 황병길, 조순응, 김천화, 강창두 등과 왼손 무명지를 끊고 태극기 전면에 ‘大韓獨立(대한독립)’ 네 자를 혈서로 남겼다. 이것이 1909년 2월 26일 단지동맹으로 알려진 ‘동의단지회’ 결성이었다.
동의단지회는 의병결사인 동의회의 취지와 정신을 계승해 후일을 도모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런 유지를 기념해 2001년 10월 19일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단지동맹비를 세웠다.
러시아 연해주 의병 근거지와 블라디보스토크역
구한말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의병들의 근거지 중 하나다.
이곳 얀치혜 지역은 구한말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다. 마을은 조선 이주민들에 의해 1876년 건설됐다. 약 100가구로 이뤄졌다. 현재 한인 마을이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기와, 연자방아 등이 남아 있다. 한인들이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지가 널리 퍼져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은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이 철도 편을 이용해 만주와 자바이칼 이서지역으로 왕래할 때 이용하던 곳이다. 9000㎞에 이르는 시베리아철도의 종착역이기도 하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이준이 이 역을 이용했고, 1909년 10월 하얼빈 의거 때 안중근 의사도 여기서 출발했다. 1910년 이범윤, 이규풍 등이 이르쿠츠크로 강제 추방될 때도 역시 이곳에서 기차를 탔다.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