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게 불태운 열정, 믹스토피아로 질주

입력 2025. 10. 27   16:11
업데이트 2025. 10. 27   16:14
0 댓글

K-pop 스타를 만나다 - 엔믹스 

데뷔 4년 차, 처음 이룬 지상파 음방 1위
탄탄한 가창력 갖추고도 순탄치 않던 길
신곡 ‘블루 밸런타인’ 확장의 서사 시작
성장통 딛고 마침내 믹스팝 매력 확보

 

걸그룹 엔믹스의 정규앨범 ‘블루 밸런타인’ 콘셉트 포토.
걸그룹 엔믹스의 정규앨범 ‘블루 밸런타인’ 콘셉트 포토.



완전히 연소한 불꽃의 색은 파란색이다. 지금 그 어떤 그룹보다 푸르른 열기와 강력한 스펙트럼을 내뿜고 있는 음악이 있다. JYP엔터테인먼트의 6인조 걸그룹 엔믹스(NMIXX)의 첫 정규앨범과 동명의 타이틀곡인 ‘블루 밸런타인(Blue Valentine)’이다. ‘새로운 세대를 책임질 최상의 조합’이라는 모토 아래 미지수 엔(N)과 다양성 믹스(MIX)를 조합해 등장한 이들은 ‘믹스팝’이라는 고유의 장르를 앞세워 K팝의 문법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낯선 스타일 탓에 대형기획사 소속으로는 이례적으로 순탄치 못한 길을 걸어왔다.

이제는 외롭지 않다. ‘블루 밸런타인’은 팀의 오랜 숙원이던 국내 음원차트 정상에 올랐고, 멤버들은 데뷔 후 처음으로 지상파 음악방송 1위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현장을 찾은 팬들의 환대 앞에 끝내 눈물을 보인 멤버들의 모습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짐작하게 했다. 살벌한 경쟁이 익숙한 K팝 팬덤조차 이들의 성공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엔믹스가 대중적이지 못했던 게 아니라 대중이 엔믹스를 이제야 이해한 것이다!” 이 한 문장은 데뷔 4년 차에 마침내 최전성기를 맞이한 엔믹스의 여정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한다.

엔믹스의 경력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믹스팝’이다. 그룹의 오랜 목표는 이 새 장르를 대중에게 각인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곡 안에 브라질의 발리펑크와 직선적인 록 음악을 결합한 데뷔곡 ‘O.O’의 충돌, 신호에 맞춰 힙합과 신스팝을 오갔던 ‘다이스(DICE)’ 등 초창기 엔믹스는 혼합으로 새로움을 주장했다. 그러나 엔믹스 기획자들은 K팝에서 이 같은 장르의 병렬적 배치, 심지어 완전히 다른 곡을 조립하는 공정이 이미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혁신’이 등장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점을 간과했다. 샤이니가 ‘클루(Clue)’와 ‘노트(Note)’를 매끈하게 결합해 ‘셜록(Sherlock)’을 내놓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소녀시대가 ‘아이 갓 어 보이(I GOT A BOY)’로 한 편의 뮤지컬을 선보인 때가 2010년대 초반이다.

엔믹스의 진짜 강점은 동 시기 데뷔한 경쟁 팀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가창력을 바탕으로 한 자유롭고도 정교한 창작의 도전정신이었다. 과감한 노래를 타이틀로 삼고, 세계관이 저물어 가는 시대에 서사의 힘을 믿는 뚝심이 엔믹스의 진정한 가치였다. 가장 기본적인 매력을 부자연스럽게 포장해 버리는 바람에 엔믹스의 음악 행보는 어려워졌다. ‘믹스팝’을 선보이자니 그것이 매우 새롭지 않은 데다 난해했으며, 타협하자니 그룹의 개성이 사라졌다.


걸그룹 엔믹스의 정규앨범 ‘블루 밸런타인’ 콘셉트 포토.
걸그룹 엔믹스의 정규앨범 ‘블루 밸런타인’ 콘셉트 포토.



딜레마에 빠진 그룹이 숨을 고르며 발견한 탈출구는 아이러니하게도 꾸밈없는 진솔한 모습이었다. 웹 예능 프로그램을 석권한 멤버들의 유쾌한 행보와 우정이 아리송한 음악으로 더 주목받지 못하는 비운의 그룹이란 서사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데뷔 초부터 검증이 끝났던 탄탄한 가창 실력은 여러 라이브 콘텐츠에서 ‘가창력 논란’이 한창이던 K팝 신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엔믹스는 모든 멤버가 개성 있는 보컬 톤과 흔들리지 않는 실황 능력을 갖추고 있는 드문 팀이다. K팝 아이돌이 꼭 노래를 잘할 필요는 없지만, 노래를 잘하는 K팝 아이돌에게는 더 많은 상상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진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비해 미진한 결과, 그럼에도 기획자들과 팀은 길을 잃은 미로 한가운데서도 진취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유 있는 자신감이 엔믹스 ‘극복서사’의 싹을 틔웠다.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꾼 것은 ‘Fe3O4’ 앨범 시리즈였다. 실험성과 대중성 사이의 황금비율을 찾아낸 이 시리즈로 엔믹스는 그저 어려운 음악을 하는 팀이 아니라 추세를 앞서가는 K팝 실험자로 거듭났다. 지난 3월 기고한 칼럼 ‘정답을 찾는 항해…갈 데까지 가 보자’에서 필자는 엔믹스와 관련해 “음악의 매력과 K팝 시스템, 엔믹스의 실력이 구축한 완벽한 안정성의 트러스 구조다. 실험, 도전, 안정을 아우르며 동료를 모아 온 엔믹스는 정답이 없어진 세계에서 정답이라고 믿는 방향을 향해 돌진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 ‘블루 밸런타인’은 바로 이 단단한 증명의 토대 위에서 ‘어떻게’ 보여 줄 것인지를 넘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로 나아가는 ‘확장’의 첫 페이지를 여는 작품이다.

‘블루 밸런타인’은 ‘믹스토피아’라는 목적지 직전 과거의 실패지점에 다시 한번 마주 선 소녀들의 이야기다. 내부 의견이 갈리고 감정이 과열돼 동력원(impetus)이 충돌, 결국 우주선의 엔진이 터져 버리는 상황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사랑의 양가감정’과 직결된다. 사랑하기에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의 모순, 엔믹스를 둘러싼 다채로운 전략과 철학, 가치의 충돌을 담아낸 곡이다. 차분한 무드로 출발하는 곡은 급격하게 속도를 끌어올리는 후렴구 전 부분 파트를 통해 감정을 터트리는 강렬한 록 음악과 저지 클럽 비트를 자연스럽게 결합하며 엔믹스 세계의 정립을 선언한다. 사운드의 물리적 충돌이 ‘갈등-좌절-극복-성숙’이라는 감정의 파도를 음악으로 그리는 과정이며, 믹스팝이 비로소 서사를 품게 됐음을 상징하는 곡이다.

앨범에서 ‘믹스팝’의 가치는 여러 음악 장르의 최적화된 적용으로 실현된다. 음악의 나열이 아닌 ‘엔믹스의 음악’으로 고유한 매력을 확보한 이 음악은 타이틀곡과 함께 앨범 초반을 지배하는 ‘스피닌 온 잇(SPINNIN’ ON IT)’과 불멸의 가치를 전하는 ‘피닉스(Phoenix)’, 테일러 스위프트와 비욘세 등 팝의 여왕들을 교차하는 ‘게임 페이스(Game Face)’와 ‘포디움(PODIUM)’에서 갖가지 형태로 뻗어 나간다. 한국에서 가장 대상화나 오해 없이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적인 레게톤 장르를 실현하고 있는 ‘RICO’, 데이식스와 엑스디너리 히어로즈를 보유한 JYP의 노하우가 두드러지는 ‘어도어 유(ADORE U)’ 등 즐길거리가 많다. 앨범의 마지막에 ‘O.O’를 둘로 쪼개 보너스 트랙으로 배치한 선택은 엔믹스의 성장통이 믹스토피아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음을 증명한다.

혼돈의 파도를 넘어 마침내 새로운 대양에 도착한 엔믹스. 성공의 지대는 고요의 바다처럼 차분하지만, 마음속 끓어오르는 열정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엔믹스의 당찬 도전이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필자 김도헌은 대중음악평론가다. 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이다. 음악채널 제너레이트(ZENERATE)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다.
필자 김도헌은 대중음악평론가다. 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이다. 음악채널 제너레이트(ZENERATE)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