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7월 20일 오후 4시, 서울 갤러리현대의 뒷마당에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마당굿이 열렸다. 그의 동료 요제프 보이스(1921~1986)를 기리는 진혼굿이었다. 오귀 굿의 기능보유자 김유선, 김석출이 함께했다. 이 굿을 보려 운집한 사람 중 일본에서 온 화가 이우환(1936~ )도 있었다. 이우환은 세계 미술의 중심에서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백남준을 늘 의식했다. 둘 다 젊은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이우환은 니혼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백남준은 도쿄대학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철학과 미학, 두 사람은 전공이 비슷했다. 이우환은 일본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었고, 백남준은 미국 뉴욕이 활동무대였다. 백남준은 독일 시절부터 ‘아시아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로 불릴 정도로 파괴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도쿄는 미술세계의 변방이었다. 이우환은 미술세계의 중심 뉴욕에서 세계적인 활동을 하는 백남준을 의식했다. 생전의 백남준이 도쿄 와타리움미술관에서 전시했을 때 팸플릿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우환은 백남준의 요제프 보이스를 위한 진혼굿을 보고 있는 그의 후배에게 말했다. “난 저 사람이 두려워.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인간이거든.”
이우환은 백남준이 가진 ‘불안의 힘’이 부러웠다. 이우환은 당시 이미 일본 미술계에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55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해 한 학기만 다니고 일본으로 밀항했고, 대학을 졸업해도 별 직업 없이 거칠고 빈곤한 20대를 보내야 했다. 이제 그 시절과는 판이한 삶이었다. 다마대학 교수에다 가마쿠라에 집도 있고, 그림도 꽤 잘 팔려 생활은 안정됐다. 외국인으로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백남준은 이름은 크게 났지만 그가 하려는 프로젝트마다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는지라 늘 돈 문제에 시달렸다. 한국 최고 재벌 아들로 태어나 서울과 홍콩, 일본에서 살 때까지는 풍요로웠다. 독일에 가고 나서 집안의 지원이 끊겼다. 번역으로 용돈을 벌고 정크푸드로 식사를 해결했다. 파괴적인 작품활동으로 명성은 얻었지만 경제는 초라했다. 늘 불안한 삶이었다.
안정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우환은 불안한 삶의 주인공 백남준이 부러웠다. 일반인에겐 불안이 독이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안정이 곧 독약이라는 걸 이우환은 잘 알고 있었다. 세계적인 명성의 작가란 세계적인 스케일의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자에 다름 아니다. 가마쿠라 자택에서 하치오지의 다마대학으로 출퇴근하는 평온하고 안온한 루틴의 삶은 예술가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 이우환은 늘 평온한 일본이 지루했다. “난 일본의 삶이 싫어. 여긴 뉴욕 같은 불안이 없어”라고 불평했다.
이우환은 적극적으로 불안을 찾아 나섰다. 2011년, 드디어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2019년에는 미니멀 아트의 성지 뉴욕 근교 디아비컨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2023년 10월에는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크 반호프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점, 선, 바람 등 초기작업, 다이얼로그, 조응 등 최근 작업은 물론 철판 위에 돌 설치작업, 전구 작업 등이 여러 방에 나뉘어 전시됐다.
이론이 탄탄한 이우환은 자신의 미술론을 한국어로 풀어나갔다. 로비 모니터 앞에 모인 관객들은 독일어로 번역된 자막에 집중했다. 같은 시기, 같은 미술관에서 독일이 낳은 불세출의 작가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도 열리고 있었다. 이우환의 전시 규모가 4배 더 컸다. 불안의 힘이 가져다준 보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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