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페르소나
‘착한 여자 부세미’의 인생리셋 흙수저 전여빈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
무술 다지고 검정고시…준비된 흙수저
짠내와 쿨내 오가는 연기 스펙트럼
“도전해봐, 일단 해보는 거지 뭐”
신분세탁 따라 1인 3역 변화
천천히 밑천 다진 ‘영란’과 닮은꼴
수저의 색깔을 바꾸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어진 시대다. 노력한다고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시대는 이른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을 외치게 만들었다. 남은 생을 노력해 일궈내는 것보다 차라리 ‘인생 리셋’을 꿈꾸게 했다. 그러니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인생 리셋’을 판타지를 통해서나 대리충족하려는 ‘회귀물’들이 각광받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시간이 과거로 되돌려져 다시금 인생 2회차를 살게 되는 판타지가 그것이다. ENA 드라마 ‘착한 여자 부세미’도 바로 그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다만 다른 건 그 판타지가 공상 차원이 아니라 상상 차원에서 벌어진다는 점이다.
흙수저 김영란(전여빈)은 생리대를 살 돈 1만 원이 없어 이를 훔치다 실형으로 6개월을 살다 나오기도 한 이 불쌍한 청춘은 국민 라면 신화의 가성그룹 가성호 회장(문성근) 경호를 맡게 되면서 인생 리셋의 기회를 얻는다. 의붓자식 가선영(장윤주)과 가선우(이창민)가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친딸까지 죽이자 가성호 회장은 목숨을 던지는 복수를 계획한다. 그것은 김영란과 계약결혼해 공식적인 상속녀를 만듦으로써 저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계약결혼 후 말기암으로 고통받던 가성호 회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제 김영란은 계약대로 3개월 후 주총에서 주식을 행사해 가선영과 가선우를 몰아내야 하는 미션을 부여받는다. 다만 3개월 동안 저들의 위협 속에서 생존해내야 하는데,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무창이라는 작은 동네로 숨어 부세미라는 이름의 유치원 교사로 위장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식의 공상적 차원이 아니라 계약결혼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는 ‘인생 리셋’의 이야기는 그래서 1인 3역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저 아무것도 없이 몸뚱어리 하나만 있어 알바를 전전하며 엄마 빚에 허덕이는 김영란과, 가성호 회장과 계약결혼을 함으로써 이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 사모님이자 미망인이 된 김영란, 그리고 자신을 제거하려는 자들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유치원 교사로 신분을 바꾼 채 살아가는 부세미가 그들이다. 이를 연기해내야 하는 전여빈의 어깨가 남달리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 상상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인생 리셋’을 기회로 바꾸는 건, 그녀가 이미 준비된 존재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경호원으로 일할 수 있을 정도로 무술을 익혀 태권도 3단, 합기도 1단의 소유자다. 불우한 가정에서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장롱면허지만 1종 운전면허를 땄다. 무엇보다 특별하게 보이는 건 남다른 공감력과 과감한 결단력이다. 가성호 회장이 사정을 이야기하며 계약 결혼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녀는 처음엔 주저했지만 자신의 현실을 미루어 보고 나아가 회장의 사정을 공감하면서 결국 결단을 내렸다. 또 의외로 이 인물은 다른 역할을 연기하는 것에도 재능을 보인다. 이것은 그저 허황된 인생 리셋을 바라기만 해서는 가질 수 없는 자질이다.
그리고 이건 전여빈이라는 소녀가 배우라는 삶으로 인생 리셋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연기의 길에 들어서기 전, 전여빈이 해왔던 노력들을 들어보면 그녀가 얼마나 늘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실감한다. 대학 시절 전공수업 이외에도 체육학과, 무용과, 실용음악과, 회화과, 문예창작과 등 다른 전공수업들을 청강했고, 연극을 배우기 위해 대학로에서 2~3년간 연극 스태프로도 일했다. 영화제 스태프, 연극 조연출, 뮤지컬 스태프 등 다양한 경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무수한 ‘준비들’이 쌓여 어느 날 영화 관계자의 오디션 제의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거였다.
단편부터 장편의 조단역을 거쳐 전여빈이 대중문화업계에 존재감을 알린 건 처절한 내면연기를 보여준 ‘죄 많은 소녀’를 통해서다. 이 작품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타며 각종 영화상의 신인연기상 후보로 올라간 전여빈은 이병헌 감독의 ‘멜로가 체질’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빈센조’로 확고한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세웠다. 영화 ‘낙원의 밤’으로 누아르를, ‘거미집’으로 시대극을, ‘하얼빈’으로 역사극을 또 ‘검은 수녀들’로 오컬트물 연기까지 섭렵한 전여빈은 ‘글리치’ ‘너의 시간 속으로’ 같은 드라마로 글로벌 인지도를 넓히기도 했다. 비범함과 평범함이 겹쳐져 있는 듯한 이미지는 ‘빈 도화지’ 같은 배우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의 역할들이 주어질 수 있게 했고, 그때마다 전여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거미집’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받았을 때 전여빈이 수상소감에서 말한 이른바 ‘중꺾그마’ 정신은 그녀의 연기 도전이 어떤 것들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며 “마음 하나 있으면 그 마음이 믿음이 되어서, 실체가 없는 것이 실체가 될 수 있도록 엔진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영화’ 같은 작품에서 시한부 역할을 맡아 그 인물에 완전히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를 했던 그녀가 ‘착한 여자 부세미’에서 짠내와 쿨내를 오가는 장르적 캐릭터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 마음이 믿음이 되는 ‘중꺾그마’ 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인생 리셋을 꿈꾸지만 그건 결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는 힘은 ‘중꺾그마’ 정신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전여빈이 연기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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