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후예가 잉글랜드 왕이 되기까지… 한땀 한땀 수놓은 대서사시

입력 2025. 10. 22   16:33
업데이트 2025. 10. 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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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바이외 태피스트리 - 노르만 공작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기록

서자 출신 약점 극복하고
노르망디공국 통치자로 우뚝
잉글랜드 왕 후사 없이 죽자
기병 앞세워 왕위 찬탈 나서
마침내 ‘정복왕’ 호칭 얻고
일련의 과정 자수로 남겨
68m 리넨, 파노라마처럼…
서양 중세 생활사 사료 가치

 



영국의 대표적 관광지인 런던을 여행하다 보면 ‘윌리엄 정복왕(William the Conqueror·사진)’이라는 이름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그는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권력 다툼 와중에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영지에서 원정군을 이끌고 1066년 9월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을 침공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동남부 헤이스팅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접전 끝에 잉글랜드 왕 해럴드(Harold Godwinson·1022~1066)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윌리엄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해 마침내 잉글랜드 왕좌의 주인공이 됐다. 이로써 그는 ‘정복왕’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원래 바이킹의 후예인 그가 창업한 노르만 왕조는 이후 2세기 이상 잉글랜드를 지배했다.

그렇다면 원래 북유럽이 근거지인 바이킹은 어떻게 프랑스 서부 해안의 노르망디 지방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이들의 끊임없는 약탈에 시달리다 못한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가 911년 바이킹 부족의 지도자 롤로(Rollo·846~930?)와 조약을 맺고 그에게 센강 하구 노르망디 지역을 봉토로 줘 정착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쪽의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주민들이 차츰 노르망디 지방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프랑스 왕국의 언어, 관습, 종교를 수용하면서 점차 뿌리를 내렸다. 롤로의 후계 통치자들도 선조가 남긴 유지에 충실하면서 초기 공국을 발판 삼아 프랑스 서부 해안지방에서 점차 세력을 넓혔다.

세월이 흐른 뒤 4대 노르망디 공작이 된 인물이 바로 윌리엄이었다. 그는 서자 출신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인고의 노력 끝에 1047년경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노르망디 공국의 실질적 통치자로 올라섰다. 어린 나이에 공국을 물려받아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가면서 윌리엄은 유능한 영주이자 지략과 담력을 겸비한 군사령관으로 거듭났다. 프랑스 정치계의 혼란 속에서도 노르망디 영토를 점차 넓혀온 윌리엄은 그 눈을 공국 밖으로 돌리고자 했다.

마침내 1066년 기회가 찾아왔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재위 1042~1066)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왕위계승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치열한 왕위계승 다툼에서 최종 경쟁자로 남은 두 사람은 왕실의 인척이던 잉글랜드의 해럴드와 노르망디의 윌리엄이었다.

먼저 기선을 잡은 것은 해럴드였다. 그가 유력 귀족들의 추대로 1066년 1월 초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윌리엄이 아니었다. 잉글랜드 원정을 결심하고 침공계획을 구체화했다. 마침내 1066년 9월 28일 2000명이 넘는 기마병을 포함, 총 8000여 명의 병력을 수백 척의 함선에 싣고 잉글랜드 동남부 헤이스팅스 인근에 상륙했다. 이때 북쪽에서 내려온 해럴드의 군대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었다. 양군은 10월 14일 헤이스팅스의 완만한 구릉지에서 충돌했다. 양측의 병력 규모는 비슷했으나 보병 위주의 잉글랜드 군대에 비해 윌리엄 군대에는 유럽 대륙에서 명성을 떨쳐온 기병이 버티고 있었다.

오전부터 격전이 벌어졌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았다. 그러자 늦은 오후쯤 윌리엄의 기마대가 공격 도중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교묘한 기만(欺瞞)작전을 펼쳤다. 의도한 대로 적군의 퇴각에 고무된 잉글랜드군 병사들이 밀집대열에서 이탈해 기마대를 추격해 구릉지 아래로 떼 지어 몰려갔다.

이것은 해럴드 군대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갑자기 선회해 공격하는 기병대에 대형이 무너진 잉글랜드 병사들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격전 중 최고사령관인 해럴드 왕마저 한쪽 눈에 노르만 궁수가 쏜 화살을 맞고 낙마해 죽고 말았다. 그해 12월 성탄절에 윌리엄은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며 명실상부한 잉글랜드의 국왕, ‘정복왕’으로 등극했다.

 

11세기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을 이끈 ‘정복왕 윌리엄’의 원정 출발부터 국왕 즉위까지 일련의 과정을 담은 자수 작품인 ‘바이외 태피스트리’. 길이 68.3m, 폭 50㎝의 거대한 작품으로 프랑스 노르망디지방 소도시 바이외의 바이외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필자 제공
11세기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을 이끈 ‘정복왕 윌리엄’의 원정 출발부터 국왕 즉위까지 일련의 과정을 담은 자수 작품인 ‘바이외 태피스트리’. 길이 68.3m, 폭 50㎝의 거대한 작품으로 프랑스 노르망디지방 소도시 바이외의 바이외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필자 제공

 

 

 



이러한 윌리엄의 원정 출발부터 잉글랜드 국왕 즉위까지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는 문화유산이 바로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길이 약 68.3m, 폭 약 50㎝ 정도 되는 9개의 판을 이어붙인 리넨 천에 붉은색·푸른색·노란색 천연염료로 착색한 양모 색실을 이용한 자수 작품이다. 현재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소도시 바이외 박물관에 보존돼 일반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윌리엄 정복왕의 이복동생으로 1049년부터 바이외 주교로 봉직하며 헤이스팅스 전투에도 참전한 오도(Odo·1036~1097)의 의뢰·후원으로 윌리엄의 잉글랜드 왕 즉위 직후 작업에 착수해 10여 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오도의 영지가 있던 영국 동남부 캔터베리 지방의 이름난 자수공방에서 제작한 뒤 노르망디 바이외로 옮겼으리라 짐작된다.

이토록 긴 태피스트리에는 잉글랜드 원정 전체 과정을 58개로 집대성한 장면들이 시간 흐름에 따라 서사적으로 수놓아져 있다. 1064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가 죽기 전 노르망디에 윌리엄의 왕위 계승을 승인하도록 요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에드워드 왕의 죽음, 해럴드의 왕위 계승, 윌리엄 원정대의 출발,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의 죽음과 잉글랜드군의 패배 및 퇴각 등이 담겨 있다. 또 현재 일부가 소실되기는 했지만 1066년 12월 윌리엄의 대관식 장면까지 약 2~3년 동안 벌어진 사건들도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져 있다. 여기에 간혹 해당 사건 장면의 상단 또는 중간에 인물이나 장소 등을 지칭하는 라틴어 문구도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어떠한 측면에서 역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을까?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단순한 직물 예술품을 넘어 중세 유럽의 다양한 측면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사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유일한 1차 자료다.

게다가 서양 중세의 경우 생활사 측면에서 사료가 크게 부족한 형편인데, 이 태피스트리에 묘사된 그림들을 통해 당대 중세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중세 문화사나 사회생활사 등의 연구에도 유용하지만 무엇보다 당시 갑옷, 투구, 방패, 심지어는 전술 등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서 중세 전쟁사 연구에 매우 유용한 사료로 활용할 수 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제작된 뒤 몇 차례 훼손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약 700년 동안 바이외 대성당에 보관돼 있다가 1983년 완공된 전용 박물관으로 이전됐다. 2007년에는 가치가 인정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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