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 북·대포 소리까지 생생하게… 악보에 새긴 전장의 함성, 승리를 노래하다

입력 2025. 10. 21   16:44
업데이트 2025. 10. 2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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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이베리아반도 공격, 그리고 베토벤의 ‘웰링턴의 승리’

비토리아전투서 나폴레옹군 격파 
연합군·민중 단결된 힘으로 승리
억눌려온 오스트리아인 마음 반영
15분 짧은 연주에도 초연 성황 이뤄
생생한 전투 장면·승리 기쁨 담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맞서 해안 역봉쇄령을 펼친 영국은 무역·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해상무역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곳은 스페인·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반도였다. 이베리아반도에는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가는 길목인 지브롤터해협이 있는데, 그곳이 아니면 남아프리카 지역을 돌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고 대륙봉쇄령에 협조적이었지만 포르투갈은 여전히 영국의 보호 아래 자유로이 영국과 무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영국 웰링턴 장군이 승리한 비토리아 전투를 표현하는 삽화.
영국 웰링턴 장군이 승리한 비토리아 전투를 표현하는 삽화.

 

지중해 관문 장악 위해 이베리아반도 공격

1807년 10월 나폴레옹은 쥐노(Jean-Andoche Junot) 장군에게 2만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베리아반도로 진격할 것을 명했다. 실질적인 목표는 포르투갈이었다. 나폴레옹은 사전에 스페인과 원정작전에 필요한 협조를 약속받았다. 프랑스군은 11월 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도착했고, 저항이 미미해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왕과 섭정하던 왕이 프랑스군의 진격 소식에 영국 함선을 타고 브라질로 도피해 그저 점령만 했을 뿐 아무런 관계를 설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프랑스군의 상태는 더욱 큰 문제였다. 프랑스에서 리스본까지는 1400㎞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동해 오는 동안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낙오자가 수두룩했다. 또한 기동을 위해 보급을 경량화하면서 보급품을 주로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이베리아반도 상황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식량은 부족했고, 도로마저 엉망이었다. 스페인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이 무렵 스페인 내부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왕이 무능해 왕비와 왕비의 정부가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이에 왕자가 불만을 품어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또한 대륙봉쇄령으로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했음에도 밀무역이 성행하고, 관리들은 부패해 있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지친 프랑스군을 보강하고 스페인의 질서 회복과 왕실 내 대립을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약 12만 명의 군대를 스페인에 추가로 파병했다.

웰링턴 장군의 초상화.
웰링턴 장군의 초상화.

 

베토벤의 '웰링턴의 승리' 악보 표지.
베토벤의 '웰링턴의 승리' 악보 표지.

 


나폴레옹 군대, 게릴라전의 늪에 빠지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과 왕자를 프랑스 국경 근처로 불러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고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자 스페인 민중은 크게 반발해 여기저기서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마드리드에서는 프랑스군이 시위하는 민중에게 포격을 가해 시민을 분노케 했다. 시민은 프랑스군을 적으로 대하면서 마구 살상했고, 스페인군도 민중에 합세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반(反)프랑스 무장세력이 대규모화되면서 여기저기서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에 프랑스군이 보급 문제를 주민으로부터 해결하면서 약탈을 일삼아 적대감은 더 커졌다.

영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규모 보급지원을 했다. 마침내 1808년 8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 원정군 1만 명이 도착했다. 포르투갈에서도 반프랑스 무장활동이 확대됐고, 급기야 스페인 무장군대에 일부 프랑스군이 패배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마드리드로 입성한 무장군대는 조제프를 폐위시켰다.

여기에 영국군까지 가세했다. 스페인·포르투갈·영국군이 연합했고, 특히 민중이 소규모 단위로 전투 행동을 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해 지친 프랑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영국이 주도한 연합군은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연승하며 프랑스군을 국경지역인 바스크까지 밀어붙였다.


영국 웰링턴 장군, 비토리아 전투서 승리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12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참전했다. 나폴레옹의 출전 자체가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 1808년 12월 나폴레옹은 연합군대를 격퇴하고, 스페인 마드리드를 되찾았다. 승리한 나폴레옹은 군대와 지휘권을 예하 사령관에게 주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1809년 초 프랑스군은 다시 포르투갈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프랑스군은 일부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결국 포르투갈 점령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 웰링턴 장군이 다시 포르투갈에 상륙해 진격하면서 프랑스군은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웰링턴 장군은 프랑스군의 재침공을 막기 위해 3중 방어선을 구축했다. ‘토레스 베드라스(torres vedras)’란 이름의 이 방어선은 흉벽과 요새, 강화된 진지로 구성됐다. 일부 프랑스군이 포르투갈 내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연합군에 대패하면서 많은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군은 병력의 재보충이 중단된 상태였고, 현지 보급상태마저 매우 열악해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이베리아반도 전쟁은 장기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대비해 이베리아반도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웰링턴은 1812년 포르투갈에서 스페인 방향으로 공격했고, 스페인 중부 살라망카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1813년 6월에는 영국·포르투갈·스페인 연합군이 스페인 북부 비토리아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며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비토리아전투의 일등 공신은 민중이었다. 민중으로 구성된 게릴라는 프랑스군 동태를 파악해 연합군에 제공하고, 프랑스군의 작전을 방해하는 등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비토리아전투는 연합군과 민중의 단결된 힘이 만들어낸 값진 승리였다.


베토벤, 웰링턴의 승리를 음악에 담아 

베토벤은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전투에서 웰링턴이 나폴레옹 군대를 격퇴했다는 소식에 전쟁 교향곡 ‘웰링턴의 승리 또는 비토리아 전투(Wellingtons Sieg oder die Schlacht bei Vittoria), Op. 91’을 작곡했다. 베토벤은 그해 12월 빈에서 초연을 지휘했다. 공연은 큰 성황을 이뤘다. 나폴레옹 군대에 억눌려온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였다. ‘웰링턴의 승리’는 표지에 ‘교향곡’이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4악장이 아니라 1부와 2부로 구성됐고, 연주 시간은 약 15분으로 비교적 짧다. 전쟁 교향곡답게 북과 나팔, 총소리, 대포 소리 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1부는 ‘전쟁터’, 2부는 ‘승리의 교향곡’이라는 표제를 갖고 있다. 1부에서는 영국군 진영의 북소리와 나팔소리, 행진이 묘사된 뒤 프랑스군의 북소리와 나팔소리, 행진으로 시작된다. 이어 영국군의 공격과 프랑스군의 대응 등 전투 장면을 총소리와 대포 소리를 그대로 살려 최대로 묘사했다. 2부는 전형적인 관현악 연주로 값진 승리, 고난의 승리, 영광된 승리를 쟁취했다는 뿌듯함과 감격의 분위기를 담았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서천규 국방부 군비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클래식과 전쟁사』 등이 있다.
필자 서천규 국방부 군비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클래식과 전쟁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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