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빛으로 돌아오라, 스스로 횃불 되어 비춘 그 길로…

입력 2025. 10. 21   16:40
업데이트 2025. 10. 2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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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전국 독립운동기념관 탐방 ⑨ 부산광복기념관 

강제로 열린 첫 개항장
수탈에 저항한 주민
돌·기와 던지며 막아서
최초의 반일투쟁 기록
주부는 반찬 줄여가며
나랏빚 갚기에 나서고
시집갈 때 입을 옷감 찢어
태극기 만든 여학생들
부두 노동자 대규모 파업
학생 시위 ‘노다이 사건’도
한국 독립운동사 축소판

부산 중앙공원은 단순한 도심 속 쉼터를 넘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호국의 성지’다. 6·25전쟁 당시 최초의 승전고를 울린 대한해협해전의 전승비부터 4·19의거 기념탑, 그리고 수많은 호국영령을 모신 충혼탑까지, 공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호국박물관과 같다. 이 중심에 일제강점기 부산의 치열했던 항일정신을 오롯이 품고 있는 부산광복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방일보가 기획 연재한 ‘전국 독립운동기념관 탐방’ 마지막 장소는 부산광복기념관이다. 글=임채무/사진=조용학 기자

부산광복기념관 내 마련된 독립운동가 위패 봉안소.
부산광복기념관 내 마련된 독립운동가 위패 봉안소.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탁 트인 천장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방문객을 맞는다.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다’란 의미입니다. 빼앗긴 빛을 되찾았다는 기념관의 의미를 건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밝은 미소로 기자를 맞이한 박차남 문화관광해설사는 기념관을 이렇게 소개했다. 기념관은 광복 55주년을 계기로 시민들의 뜻을 모아 2000년 8월 15일 개관했다. 2층으로 이뤄진 단출한 공간이지만 그 안에는 부산이 일제 저항의 첫 관문이자 독립운동사의 중심에 있었다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수탈의 첫 관문, 저항의 씨앗을 틔우다

부산의 항일 역사는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열린 첫 번째 개항장이 되면서 부산은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이자 수탈의 통로가 됐다. 치외법권, 무관세 무역 등 불평등한 조약 아래 일본인들은 침략의 발판으로 부산을 선택하고 초량에 왜관을, 부산항에는 전관 거류지인 조계를 설치해 많은 일본인을 이주시켰다. 왜관과 조계 등을 통해 침투한 일본인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부산의 토지를 사들여 1905년 공유지·민유지를 538만 평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조계지의 200배에 달하는 크기였다. 또한 일제는 일본 통화를 유통하면서 조계지 내에 제일은행 부산지점을 설치하고 경제수탈에 박차를 가했다.

수탈이 거세질수록 저항도 거세졌다. 1876년 4월 일제가 일본 군함 봉상함을 타고 측량을 구실로 동래 일대를 탐색하고 다니자 주민들은 돌과 기와를 던지며 막아섰다. 이 사건은 개항 후 동래에서 일어난 최초의 민중적 반일투쟁으로 기록됐다. 1884년 10월에는 일제가 헐값에 쌀을 수탈해 가자 “아무리 풍년이 들어도 너희에겐 팔지 않겠다”며 판매를 거부하는 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저항 사건은 모두 개항과 일본 전관 거류지 설치를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의 항일감정이 폭발해 일어난 것이었다.


부산광복기념관 전경.
부산광복기념관 전경.

 

부산독립운동사를 설명 중인 박차남 해설사.
부산독립운동사를 설명 중인 박차남 해설사.

 

부산중앙공원 충혼탑.
부산중앙공원 충혼탑.



“나랏빚, 우리가 갚자”…계몽과 연대의 불길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부산에서도 뜨겁게 타올랐다. 상인단체인 ‘부산객주상법회의소’를 중심으로 기생, 승려, 이름 없는 걸인까지 각계각층이 운동에 동참했다.

특히 좌천리 부인들은 반찬 가짓수를 줄여 돈을 모으는 ‘감선의연(減膳義捐)’ 활동으로 힘을 보탰는데, 이는 당시 부산의 저항이 얼마나 생활 깊숙이 뿌리 내렸는지를 보여준다. 상세하게 남아 있는 기록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어두움에서 깨어나자’는 애국계몽운동의 물결 속에서 교육 구국 운동도 활발했다. 동래 지역의 지식인들이 만든 ‘동래기영회’는 수많은 학교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다. 이 단체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며 부산지역에서 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독립 향한 소녀들의 함성 

부산 독립운동에서 빠질 수 없는 학교가 바로 일신여학교다. 호주 선교사가 세운 이 학교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며 부산 항일운동을 선도했다. 3·1만세운동도 마찬가지였다.

3월 2~3일께 독립선언서가 비밀리 서울에서 부산 학생대표단에게 전해지면서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의거를 준비했다.학생들은 기숙사 벽장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빛을 가린 채 시집갈 때 쓰려 했던 옷감을 찢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교사들과 함께 같은 달 11일 오후 9시경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좌천동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의 용기 있는 만세 시위는 동래고보, 범어사, 구포장터 등으로 번져나가며 부산 전역을 독립의 열망으로 물들였다. 부산·경남 3·1운동의 효시가 되는 ‘일신여학교 3·1독립운동’이 바로 이 사건이다.


부산, 항일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20년대, 일제의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도 거세졌다. 1년만 일하면 폐병에 걸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열악했던 조선방직에서는 6차례의 파업이 일어났다. 1921년에는 5000여 명의 부두 노동자가 대규모 동맹파업을 벌였다. 1940년 열린 경남학도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군사 훈련을 겸한 체육대회)에서는 일본 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일본군 장교 노다이가 민족차별적 편파 판정을 하면서, 이에 항의한 동래중학(현 동래고)·부산2상(현 개성고) 1000여 명 학생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 ‘노다이 사건’도 있었다. 당시 일제는 이 사건이 제2의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보도를 통제하며 억압을 이어나갔다.

“부산의 독립운동은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침탈의 시작점이었고,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의 주요 거점이었으며, 임시정부의 자금줄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축소판이었죠.” 박 해설사는 부산의 독립운동이 유독 치열하고 다양했던 이유를 ‘첫 침탈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먼저 짓밟힌 곳이었기에 저항정신이 그 어느 곳보다 강하게 타올랐다는 것이다.

마지막 탐방 장소는 바로 부산 출신 또는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위패를 모신 봉안소였다. 박 해설사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모두를 모시기에 비좁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이곳을 찾는 분들이, 특히 젊은 세대가 우리가 누리는 오늘의 평화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기억하고, 그 이야기를 주변에 나눠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광복 80주년, 기념관과 부산 곳곳에 새겨진 치열했던 저항의 역사를 오늘날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의 완성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부산 곳곳에 살아 숨쉬는 독립의 기억
폭탄 의거 박재혁·여성 무장 독립투사 박차정…
거리 조성·생가 복원·동상 세워 숭고한 뜻 기려

부산은 기념관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 독립 영웅들의 흔적을 새겨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박재혁 의사 생가가 있던 범일동 KT부산정보통신센터 앞 사거리 일대 630m 구간은 ‘박재혁 거리’로 조성됐고, 부산 어린이대공원 성지곡수원지 근방에는 그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 있다. 의열단원이었던 박 의사는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에게 접근, 폭탄을 투척해 그를 처단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자신도 중상을 입고 체포된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옥중에서 “나는 일본인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단식 투쟁 끝에 장렬히 순국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의 삶도 재조명되고 있다. 일신여학교 출신인 박 의사는 오빠들을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고, 단장 김원봉과 결혼한 그는 군사간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중국 장시성 곤륜산 전투에 참전해 총상을 입었다. 이 부상의 후유증으로 광복을 1년 앞두고 3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념 논란에 휩싸여 잊혔다가 1995년에야 정부 서훈을 받았다. 그의 생가는 동래구 복천동에 복원됐으며, 금정문화회관에는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그의 동상이 세워져 여성 무장 독립투사의 기개를 보여준다.

‘독립 자금의 대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정신은 그가 활동했던 옛 백산상회 자리에 세워진 백산기념관과 용두산공원의 흉상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안 선생이 설립한 백산상회는 표면상 무역회사였지만, 실제로는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의 연락망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줄이었다. 임시정부 독립 자금의 60% 이상이 이곳을 통해 조달됐다고 전해진다. 백산상회가 일제에 의해 폐쇄된 후에도 그는 만주에서 ‘발해농장’을 일구며 끝까지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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