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 독보적 레트로 감성
서울 한복판 흑백사진 같은 골목 어둠이 내리면 형형색색 네온사인
돈이 넘쳐나던 옛 영화는 갔지만 순댓국·냉면 노포는 그 자리에
새롭지 않아 더 새로운 꾸미지 않은 찐 감성
노가리에 골뱅이 와인과 이국의 음식 아쉬움 없어라
요즘 가장 핫한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단연 ‘을지로’라고 답할 수 있다. 서울의 한복판, 명동과 청계천 사이의 을지로는 한때 인쇄소와 조명 가게, 타일 가게로 빽빽한 곳이었다. 1960년대 형성된 이곳 상권은 다른 번화가와는 확연히 다른 향을 풍긴다. 낡은 간판, 녹슨 철문, 칙칙한 회색빛 건물들이 뒤섞여 숨만 들이쉬고 내뱉어도 ‘힙’한 아이디어가 솟아날 것 같다. 골뱅이와 노가리 굽는 냄새, 차가운 맥주, 사람으로 가득한 골목골목에 정신을 차리기란 쉽지 않다. 여전히 좁은 골목에 있는 인쇄소, 공구 가게, 철공소에선 노동의 현장이 이어지고 낡은 건물을 개조한 술집, 감각적인 퓨전 식당 등 오래된 맛집이 여행자의 발길을 붙든다. 복고 감성에 신선한 아이디어 한 스푼이 더해진 을지로는 서울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알찬 골목이 됐다. 짜릿한 흥을 느끼고 싶은 사람, 깨알 재미를 찾는 사람은 을지로로 가면 된다. 행복의 기운과 영감을 듬뿍 충전받을 수 있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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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사람이 모이는 곳
을지로가 서울의 중심 산업지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서울 한복판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엔 ‘혼마치(本町: 일본어로 ‘본거리’ ‘중심 거리’라는 뜻)’라 불렸다. 하지만 광복 직후인 1946년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 ‘을지로’로 바뀌었다.
1960년대 이후 경기가 회복되면서 이곳은 제조업과 인쇄산업의 심장이 됐다. 철공소, 타일 공장, 조명 상가, 인쇄소 등이 밀집해 ‘못 만드는 것이 없는 곳’이라 불렸다. 자동이체와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이라 거래는 모두 현금이었다. 상인들은 큰 액수의 지폐를 보따리째 싸매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며 철강, 공구, 잉크, 인쇄물 등을 현장에서 사고팔았다.
고액권인 1만 원권 지폐를 당시 ‘수박’이라고도 했다. 지폐 색깔이 녹색을 띠었기 때문인데 초록색 돈뭉치를 들고 다니며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을 ‘수박맨’이라고 했다. 하루에 수백만 원이 오가는 거래가 흔했기 때문에 을지로 상권은 ‘큰손’의 중심지가 됐다.
1970년대 100만 원은 현재 가치로 약 5000만 원이니 지금으로 치면 수억 원의 현금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흔했다는 얘기다. 이들은 임대 건물을 사들이거나 공장을 확장하며 ‘을지로 부자’로 불렸고 을지로 일대의 산업 생태계를 키워 나갔다. 2010년대 이후 재개발이 지연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임대료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낡은 공장 골목에 젊은 창업자와 예술가들이 들어서며 을지로는 다시 한번 활력을 얻었다. 산업의 집적지에서 ‘낡음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문화의 거리로 진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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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은 인쇄소, 실내는 술집
을지로 상권은 단순한 유행의 산물이 아니라 명확한 구조적 변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2020년대 들어 이 지역의 골목을 구성하는 업종을 살펴보면 음식점·주점이 약 45%, 카페·디저트 가게가 약 20%, 그리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명·인쇄·철공 관련 업종이 약 30% 내외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소규모 갤러리나 빈티지 편집숍 같은 문화 상점들이다.
특히 조명 골목과 공구 거리에선 ‘간판만 바꾼’ 가게도 많다. 겉은 예전 그대로지만 내부는 트렌디한 바, 카페로 개조된 경우다. 이런 형태는 을지로 특유의 ‘낡음 속 새로움’이라는 감성을 강화하는 요소가 된다. 최근 들어선 독립 와인바, 이자카야, 감각적인 디저트 카페, 아트북 서점, 팝업 스토어 같은 ‘감각 기반 업종’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단순 소비가 아니라 ‘감성’을 중시하는 MZ세대와 관광객이 주요 고객층이 되면서 을지로는 전통 상권과 신흥 상권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상업지구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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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황홀한 떠들썩함
약속이 있어 모처럼 을지로를 찾았다. 지금도 핫한 곳이지만 예전에도 노가리나 골뱅이에 맥주 한잔하고 싶으면 을지로에 왔다. 예전엔 분명 칙칙한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불야성.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도 많겠지만 을지로 감성이 좋아서 여행 삼아 오는 사람도 많이 보였다.
외국인과 젊은 친구들이 골목마다 사진 찍기 삼매경이다. 울긋불긋 네온사인과 낡은 골목이 뒤섞인 분위기는 독보적으로 특별하다.
2000년대 초반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먹고 마시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일상을 천국처럼 누리는 선진국 감성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외국인들에게 지금의 을지로가 딱 그런 느낌일 것이다. 낡았지만 세련된 감성이 이식된 술집과 맛집의 흥성거림이 얼마나 짜릿하고 황홀할까? 당장 나부터 그렇다. 을지로는 코벤트가든보다 훨씬 더 독특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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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감성 없어도 OK, 오래된 맛집들
을지로엔 전국구 맛집이 꽤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댓국집 ‘청와옥’은 을지로를 대표하는 핫플레이스다. 깊은 육수와 잡내 없는 고기의 쫀득함이 일품이다. 기본 대기 30분은 각오해야 한다. 1946년에 문을 연 평양냉면의 살아 있는 역사 ‘우래옥’은 냉면 애호가들의 성지다. 보통 평양냉면은 ‘슴슴한’ 맛으로 먹는다고들 하지만 우래옥 냉면 육수는 진하다. 평양냉면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은 우래옥 냉면으로 시작하면 좋다. 단 한 그릇에 1만6000원이다. 비싸다는 이도 많은데 파스타는 더 비싸도 잘만 사 먹지 않나? 역사와 전통의 맛집에서 그 정도 가격은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요즘 을지로의 새로운 맛집들은 안주의 창의성으로 승부한다. 과거 노가리와 골뱅이가 전부였다면 지금은 고급 바비큐와 감각적인 퓨전 안주가 젊은 세대를 끌어들인다. 터줏대감 격인 식당들도 곳곳에 섞여 있어 밸런스가 아주 좋다. 중장년층에겐 추억을, 젊은이들에겐 감성을 제공하는 기특한 곳이다.
서울의 중심, 감성의 중심
을지로처럼 산업화된 곳이 핫한 장소로 바뀐 예는 전국 곳곳에 있다. 서울의 문래동, 부산의 전포동, 대구의 공구 골목도 비슷한 방식으로 핫플레이스가 됐다. 산업의 흔적이 남은 낡은 거리를 새롭게 단장하면 감성을 좇는 젊은이들이 화답한다. 세련되고 깔끔한 신도시보다 진짜 도시 이야기가 있는 옛 골목에 매력을 느낀다. 을지로는 그 움직임의 선두다.
을지로는 서울의 중심 중의 중심이다. 청계천을 끼고 있으니 자전거를 빌려 주변을 도는 건 최고의 힐링이다. 왕궁도 남산도 모두 가까우니 서울의 옛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을 테마로 잡았다면 을지로만큼 좋은 선택도 없다. 모든 생명체에 흥망성쇠가 있듯 을지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우뚝 솟는 것과 비슷하다.
서울에서 가장 흥이 넘치는 골목은 단연 을지로이고, 세계에서도 이 정도 규모로 멋들어진 술집이 밀집한 곳은 흔치 않다. 을지로에서 술을 마신다는 건 지구촌 애주가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버킷리스트를 누림을 의미한다. 가장 핫한 맥주 한 잔을 들고 건배하자. 여기는 최고의 힙한 장소 을지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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