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에 내려앉는 오색 가을

입력 2025. 10. 02   16:27
업데이트 2025. 10. 10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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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는 대로, 닿는 대로 - 발효의 고장, 전북 순창

전통 방식 고추장·된장…장인마다 다른 비법 
차원이 다른 깊은맛 사도 좋고 만들어도 좋아
천혜의 자연환경 단풍객 발길 잇는 절경 즐비
강천산 공원·채계산 출렁다리·용궐산 하늘길
천천히 오르면 섬진강·적성뜰·장군목 눈앞에

다양한 발효식품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순창발효테마파크. 필자 제공
다양한 발효식품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순창발효테마파크. 필자 제공



전북 순창군을 여행하다 보면 양지바른 언덕에 항아리들이 도열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햇살을 받으며 장류가 익어가는 풍경이다. 순창 하면 떠오르는 것이 고추장이겠지만 다양한 장류가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익어간다. 그래도 순창 고추장의 명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지리적표시제 등록을 받을 만큼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순창 고추장은 오늘날까지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그 맛을 이어오고 있다.

순창이 발효 장류, 특히 고추장과 된장에 쏟는 열정은 각별하다. 단순히 장을 담그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활용한 다채로운 식문화를 만들어낸다. 고추장 아이스크림부터 된장 스낵, 심지어 발효 커피까지.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지만 막상 맛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천고마비의 계절, 순창으로 먹부림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순창의 가을은 미각과 시각을 동시에 만족시키기도 한다. 발효 장류가 익어가는 항아리 풍경도 아름답지만, 주변을 감싼 산자락이 물들어가는 풍광은 또 다른 감동이다. 강천산의 계곡미, 채계산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절경, 용궐산의 웅장한 암벽까지. 이 모든 자연이 어우러져 순창 고추장의 깊은 맛을 완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순창장류박물관 발효소스토굴에 전시된 미디어 아트. 필자 제공
순창장류박물관 발효소스토굴에 전시된 미디어 아트. 필자 제공



명인의 손길이 닿은 전통의 맛

순창 전통고추장 민속마을은 전통 방식으로 고추장과 된장을 생산하는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순창의 장류 문화를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식품명인 강순옥 명인을 비롯해 오랫동안 장을 빚어온 생산자들의 제품을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 민속마을 곳곳에는 정성스레 관리되는 장독대가 즐비하다. 가정마다, 생산자마다 다른 비법으로 빚어낸 고추장과 된장은 순창 장류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직접 구매도 가능하다. 전통 고추장 1㎏에 2만5000~3만 원, 전통 된장 1㎏에 1만5000~2만 원 수준이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제품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이달 17일부터 19일까지 이곳에서 순창장류축제가 열린다. 한국의 전통 장류 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해 시작한 이 축제에서는 고추장과 된장을 주제로 한 다양한 체험·공연·전시가 펼쳐진다. 순창 고추장으로 만든 떡볶이 등 다채로운 먹거리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발효문화의 모든 것을 담다


민속마을 옆에 자리한 순창발효테마파크는 발효식품 문화를 다각도로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장류의 핵심인 ‘발효’를 주제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선보인다. 특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식품 과학 정보를 제공해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인기가 높다.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활용한 교육, 미디어아트, 놀이 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순창장류박물관은 테마파크 관람의 첫걸음이라 할 만하다.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우리 전통 장류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이곳에서 기초 지식을 쌓고 나면 이후 관람이 훨씬 풍성해진다. 발효소스토굴은 또 다른 볼거리다. 길이 134m, 최대 폭 46m에 달하는 토굴 안에 세계 각국의 소스 이야기를 담아냈다. 미디어아트와 트릭아트, 장류의 역사를 다루는 공간이 흥미롭다.

순창 지역 생산자들이 이곳 내부 공간을 임대해 실제로 장류를 발효하기도 한다. 역동적인 영상 작품과 함께 고추장, 된장, 간장이 실시간으로 익어가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가족 여행객, 특히 어린이를 동반했다면 푸드사이언스관과 미생물뮤지엄을 놓치지 말자. 음식을 주제로 한 게임과 퀴즈, 초콜릿 3D 프린터 등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체험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발효소스토굴, 푸드사이언스관 모두 개별 관람권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더욱 알뜰하다. 

 

강순옥 명인이 순창 전통고추장 민속마을에서 항아리를 열어 장을 확인하고 있다. 필자 제공
강순옥 명인이 순창 전통고추장 민속마을에서 항아리를 열어 장을 확인하고 있다. 필자 제공

 

순창장류박물관 발효소스토굴 입구. 필자 제공
순창장류박물관 발효소스토굴 입구. 필자 제공

 

순창고추장익는마을의 고추장 만들기 체험. 필자 제공
순창고추장익는마을의 고추장 만들기 체험. 필자 제공



직접 담가보는 전통 고추장의 맛

순창 고추장을 직접 담가보고 싶다면 체험마을로 향하는 것이 좋겠다. 순창고추장익는마을은 우리의 전통 장류 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체험 공간이다. 이곳의 대표 프로그램은 단연 고추장 만들기 체험이다.

고추장 빚는 과정은 복잡할 것 같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조청에 소금을 골고루 섞은 다음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어 정성스레 버무리면 완성된다. 간단한 과정이라고 해서 재료까지 허술한 것은 아니다. 고춧가루는 섬진강 상류에서 자란 국산 고추를 곱게 갈아 사용한다. 순창 특유의 기후가 빚어낸 고추는 순창 고추장을 탄생시킨 일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메줏가루 역시 범상치 않다. 고추장 제조만을 위해 특별히 띄운 메주를 갈아 만든 것으로, 순창 고추장의 핵심 비법으로 꼽힌다. 소금도 예사 것이 아니다. 1년 동안 간수를 뺀 ‘5월 소금’만을 고집한다. 간수를 제거하면 장이 쉽게 상하지 않고 건강한 짠맛을 낼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유다. 단맛을 더하는 조청은 식혜를 대신하는 재료로, 국산 쌀과 보리로 만들어 고추장에 감칠맛을 입힌다.

고추장 만들기 체험은 주로 단체 방문객에 한해 운영한다. 단체 방문이 어렵다면 체험 키트를 구매하는 방법도 있다. 숙소나 집에서도 손쉽게 전통 고추장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구성된 제품이다. 이 마을에서는 청국장으로 만든 스낵 ‘청순 바이츠’를 출시해 온라인과 홈쇼핑에서 인기를 얻고 있으니, 주전부리로 한두 봉지쯤 챙겨보는 것도 좋겠다.


가을을 기다리는 강천산의 여유

순창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주변 산자락을 중심으로 예로부터 이름난 절경들이 즐비하다. 강천산, 채계산, 용궐산이 대표적이다.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이 산들을 하나씩 둘러보는 것도 순창 여행의 묘미다.

강천산은 군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빼어난 경치를 품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단풍을 보러 온 여행객들로 붐빈다. 본격적인 단풍 시즌은 아니지만 초가을의 싱그러움을 느끼기엔 지금이 적기다. 강천사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사계절 내내 고요한 위안을 선사한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을 수 있도록 발 씻는 곳까지 마련돼 있을 정도로 세심하다.

1980년대 건설된 현수교는 강천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계곡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 다리를 지나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하지만 굳이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충분하다. 강천산의 부드러운 산책로를 거니는 것만으로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머지않아 펼쳐질 단풍 물결을 상상하며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순창 3대 명산으로 꼽히는 채계산 중턱에 설치된 출렁다리.
순창 3대 명산으로 꼽히는 채계산 중턱에 설치된 출렁다리.



흔들리는 다리 위 섬진강 풍경

채계산은 순창의 3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힌다. 높이 342m에 불과한 산이지만, 그 형상이 책을 쌓아놓은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낮은 고도 덕분에 등반 난도도 높지 않다. 입구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계단으로만 이어져 있어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오르다 보면 어느새 시원한 전망과 마주하게 된다.

채계산 중턱에는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출렁다리가 설치돼 있다. 건설 당시 국내에서 가장 긴 무주탑 산악 현수교였다고 한다. 출렁다리 한가운데 서면 섬진강의 특별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채계산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리 너머로는 섬진강과 적성뜰이 펼쳐진다. 적성뜰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모습까지 파노라마 작품을 연상케 한다. 누군가 다리를 건너며 흔들리는 순간에도 시선은 적성뜰에 고정되고, 입에서는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출렁다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어드벤처 전망대’가 나온다. 다리 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은 평야가 눈앞에 펼쳐진다. 가을이 깊어지면 들판의 색이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조금만 더 힘을 내 보자.


순창 용궐산 하늘길에서 바라본 풍경.
순창 용궐산 하늘길에서 바라본 풍경.



하늘길을 걷는 용궐산

최근 순창을 찾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장소가 있다면 단연 용궐산이다. 순창에서 임실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용궐산은 거대한 암벽이 산허리를 감싼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위용이 워낙 대단해서 쉽게 도전하기 망설여지기도 한다.

2020년 12월 개통한 용궐산 하늘길만 올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용궐산자연휴양림 근처에서 출발하는 등산로를 따라 약 15분만 오르면 기암절벽에 설치된 잔도와 만난다. 이곳부터는 그저 용궐산이 베푸는 아름다운 순간을 만끽하면 된다. 용궐산 8부 능선에 조성된 이 잔도는 순창과 섬진강 상류가 간직한 비경을 드러낸다. 예로부터 장군목이라 불린 물줄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섬진강 너머로 끝없이 이어지는 산줄기는 유려한 곡선의 수묵화를 보는 느낌이다.

일교차가 큰 요즘 같은 때라면 동틀 무렵 용궐산 하늘길을 찾아보길 권한다. 물론 늦은 오후 황금빛으로 물드는 암벽의 장관도 놓칠 수 없다.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나는 바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장엄한 풍경화다.

 

 

필자 김정흠은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주로 여행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국내외 여행 매체 등과 함께 다채로운 여행 콘텐츠를 선보인다.
필자 김정흠은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주로 여행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국내외 여행 매체 등과 함께 다채로운 여행 콘텐츠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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