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독립운동 10월의 6·25전쟁 영웅

입력 2025. 09. 30   16:30
업데이트 2025. 09. 3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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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월 6일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1독회 종료 후 현충사를 참배한 조선어학회 회원들.
1935년 1월 6일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1독회 종료 후 현충사를 참배한 조선어학회 회원들.


10월의 독립운동 한글날 제정
일제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족어 운동 

1926년 열린 한글 반포 기념식
우리말 운동의 대중화 전환점
일제는 조선어학회 집회 금지
민족운동 이유로 옥고 겪기도

국가보훈부(보훈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선열들의 뜻이 담긴 날이자 본격적인 국어운동의 출발을 알린 ‘한글날 제정’을 ‘10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기 위해 1926년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제정됐다. 2년 뒤인 1928년 ‘한글날’로 이름이 변경됐고,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돼 훈민정음의 완성 시기(1446년 음력 9월)가 확인됨에 따라 1945년 해방 이후 한글날이 10월 9일로 확정됐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문자로 “우둔한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훈민정음 서문의 문장은 이러한 한글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1896년 독립신문은 사설을 통해 “한문보다 백 배가 낫고 편리한즉 내 나라에 좋은 게 있으면 그것을 쓰는 것이 옳다”고 강조한 것은 한글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것이 곧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한글을 국문으로 삼는 것이 근대 개혁의 상징적 조치가 되면서, 한글은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구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글처럼 우수한 문자를 만든 민족으로서 한글과 우리말을 부흥시키고, 이를 통해 민족과 국가의 번영을 이끌겠다는 논리가 확립됐다.

이후 한글 창제 기념일을 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국어학자 주시경의 제자들이 결성한 조선어연구회가 1924년 2월 1일 ‘한글 창제 기념식’을 치렀다. 조선어 연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끼리 모인 소박한 기념식이었지만, 합법적으로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계기였다. 특히, 1926년 11월 4일 열린 ‘한글 반포 기념식’은 소규모 행사였던 이전과 달리 대규모로 열렸고, 일제강점기 우리말 운동이 대중화되는 전환점이 됐다.

하지만 가장 문명화된 문자를 가졌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표기법과 모어 사전이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 이에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도 민족어 운동이 꾸준히 진행됐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의 결성과 조선어사전의 편찬, 그리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 조선어 표준말 모음 발표 등이 그 예다. 그러자 일제는 1936년 표준어사정안 발표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어학회가 주최하는 모든 집회를 금지했고, 1937년 이후 한글날 기념식은 열리지 못했다.

중일전쟁과 함께 시작된 전시체제기에는 조선어학회의 이윤재, 최현배 등이 민족운동을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조선어학회는 1942년 해체 전까지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속했다. 일본의 국어상용화정책으로 우리말과 우리글의 존립을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사전 편찬을 지속했던 힘의 원천은 우리말과 글을 지켜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이었다.

이처럼 한글날은 단순히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뜻이 담긴 날이었다. 한글은 그 자체로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이지만, 동시에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한주섭 해병중령.
한주섭 해병중령.


10월의 6·25전쟁 영웅 한주섭 해병중령
장단지구전투 중공군 공세 막고 진지 탈환 

판문점~사천강 걸친 요충지이자
정전협상 우위 선점 핵심 지점
대규모 반격 속 치열한 백병전
37전초진지 탈환…끝까지 지켜

같은 날 보훈부는 6·25전쟁 당시 경기 파주시 장단지구전투에서 백병전을 벌이며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한주섭(1932~1987) 해병중령을 ‘10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 중령은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해병 간부후보생 8기 과정을 수료하고, 이듬해 7월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해병대 1연대 소대장으로 중동부 전선의 요충지인 양구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1952년 3월, 해병대 1연대는 수도 서울 방위를 위해 서부전선의 장단·사천강지구로 이동, 중공군 65군 195사단과 대치했다. 이 지역은 판문점에서 사천강 일대에 걸친 요충지로, 정전협상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치열한 고지전이 전개된 전략적 핵심 지점이었다. 해병대는 이곳에 8개 전초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공세에 맞서 싸웠다.

같은 해 10월 2일에는 중공군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사천강을 넘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37전초진지를 방어하던 1중대 2소대는 중공군에 맞서 악전고투를 이어 갔고, 통신선마저 끊기면서 진지를 상실했다. 이에 1연대 1대대는 3일부터 4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역습을 시도해 진지에 진입했지만, 그때마다 증원된 적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보고 탈환에 실패했다.

결국 10월 5일, 김석범(준장) 1전투단장은 역습부대를 편성해 37전초진지 탈환을 위한 마지막 공격을 명령했고, 한 중령은 부대원들과 함께 아군의 포격 엄호 아래 신속히 돌진해 37전초진지를 탈환했다. 이후 적의 대규모 반격 속에서도 백병전을 펼치면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 중령의 공로를 인정해 1953년 1월 10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노성수 기자/사진=국가보훈부·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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