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이되 악인은 아니기에…깊어진 연기, 짙어진 공감

입력 2025. 09. 24   15:57
업데이트 2025. 09. 2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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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페르소나
‘은중과 상연’의 미워할 수 없는 악역 완성한 박지현 

‘유미의 세포들’ 얄미운 여사친 역에서
결핍이 빚어낸 악녀 ‘상연’ 이르기까지
심도 있는 연기로 미움보다 공감 유발
잇단 강한 배역에도 호감 가는 배우로

 



어린 천상연(박서경 분)이 이사 올 아파트에 들어간 어린 류은중(도영서 분)은 그 넓고 깨끗함에 놀란다. 베란다로 떨어지는 햇살도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은중은 자연스레 자신의 집을 떠올린다.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야 하고, 주인집 대문이 아닌 셋집으로 들어가는 쪽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밤중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밖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문을 여는 것조차 꺼림직한 화장실을. 그런데 상연의 아파트에는 깨끗한 화장실이 있다. 그것도 2개나 있다. 은중은 포스트잇을 꺼내 그 집에 이사 올 아이(상연)에게 메모를 남긴다. “너는 참 좋겠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서 이 장면은 은중(김고은 분)과 상연(박지현 분)의 너무나 다른 삶의 환경을 압축해 보여 준다. 상연은 부자이고 학교에서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인 데다 장관을 지낸 사람이 있을 정도로 집안도 좋다. 반면 은중은 당시로서는 평범한 서민이다.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 혼자 우유 배달에 음식점을 하며 아이를 키웠다. 은중이 아직 이사 오지도 않은 상연의 아파트 빈집에 엄마와 함께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우유 판촉을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싱크대 등을 엄마가 미리 닦아 주려 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다른 환경의 차이. 은중은 “너는 참 좋겠다”는 메모를 남길 만큼 상연을 부러워한다.

보통의 이런 설정이라면 가진 것 없는 은중과 다 가진 것 같은 상연 사이에 대립구도가 생기고, 당연히 다 가진 상연이 악역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은중과 상연’에서도 상연은 반장이 돼 짝 때문에 시끄럽게 했다는 이유로 선생님 대신 은중의 손바닥을 때리기도 한다. 이건 일방적인 은중의 입장일 뿐 상연의 입장은 다르다.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여도 상연은 늘 오빠 천상학(김재원 분)만 챙기고, 학교 선생님으로서 애제자 은중을 더 따뜻하게 대하는 엄마의 사랑에 갈증을 느낀다. 그러다가 오빠가 자살을 하고 망해 버린 집안은 상연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다. 어떻게든 견뎌 보려 하지만 엄마마저 마음의 상처가 깊어 시한부 삶을 살다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가끔 나타나 돈만 뜯어 가는 상황에 이르자 하지 말아야 할 일들까지 하게 된다. 이제 상황은 역전돼 상연이 오히려 은중을 부러워한다. 평범하지만 따뜻한 엄마와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은중. 상연은 이야기한다. “네가 멀쩡한 게 싫어. 망가졌으면 좋겠어, 나처럼.”

상연은 은중의 삶에 들어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는 악역 중의 악역이지만, 이상하게 미워할 수 없다. 그건 이 인물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근거가 제시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불행한 삶 속에서 독하게 살았고, 성공했지만 끝내 망가져 버린 몸은 죽음 앞에 그녀를 세운다. 그 끝에서 상연은 다시 은중에게 손을 내밀며 잘못했다고 빈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다시 손을 잡는다. ‘은중과 상연’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 멜로가 들어 있지만, 결국 은중과 상연의 워맨스에 방점이 찍힌다. 상연은 악역이지만 끝끝내 악역이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연 역할을 연기한 박지현은 바로 이런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의 이미지를 이 작품에서 완성했다. 2018년 영화 ‘곤지암’으로 강렬한 빙의 연기를 선보이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박지현은 ‘유미의 세포들’의 주인공 커플을 방해하는 얄미운 여사친 서새이, ‘재벌집 막내아들’의 차갑고 도회적인 외모 뒤에 욕망을 숨긴 인물 모현민 같은 악녀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영화 ‘히든 페이스’에서도 그녀는 과감한 노출 연기와 깊이 있는 내면 연기 속에서 역시 평범해 보였지만, 숨겨져 있던 악녀 본성을 드러내는 김미주라는 인물을 심도 있게 표현함으로써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이끌어 냈다.

그녀가 해 온 악녀 연기의 성장 과정을 보면 연기의 깊이가 단 몇 년 새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유미의 세포들’의 서새이가 얄미운 악녀였다면 ‘재벌집 막내아들’의 모현민은 욕망의 악녀였고, ‘은중과 상연’의 천상연은 결핍이 빚어낸 악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미의 세포들’에선 뒷목 잡게 만드는 반응을 일으켰다면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욕망을 툭툭 건드렸고, ‘은중과 상연’에 이르면 미워할 수 없는 악녀로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상처와 외로움까지 담아냈다.

“아줌마. 저 나쁜 X인데 한 번만 안아 주세요.” ‘은중과 상연’에서 상연은 은중의 엄마를 갑자기 찾아와 뜬금없이 그렇게 얘기한다. 은중의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상연을 가만히 안은 채 등을 토닥여 준다. 아마도 은중의 엄마는 상연이 겪었던 가족의 비극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녀가 왜 엇나가고 미안해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지 말이다. 이 장면은 대중이 박지현이란 배우를 이 작품을 통해 끌어안게 되는 심정 그대로다. 악녀지만 꼭 끌어안아 주고 싶은 삶의 처연함을 공감시킨 박지현이란 배우에게 느끼는 호감이랄까.

때론 삶은 원하지 않는 어떤 역할을 해야만 하는 무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저 앞서 나가 보이는 특별한 삶을 바라보며 느꼈을 부러움이 왜 없겠는가. 그건 빈부의 차원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의 차이에서도 비롯된다.

그런 역할을 맡았다면 어떻게 살아 내야 할까. 그 아픔과 상실을 꼭꼭 숨긴 채 세상에 복수하듯이 악역이라도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런 싸움이 아니라 오히려 공감하고 이해하게 함으로써 그 삶을 바꿀 수 있다. 누군가 꼭 안아 주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더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얄밉고 뻔뻔한 악역을 맡아도 끝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박지현처럼.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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