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 스타를 만나다
미친 세상 속 더 자유롭게 미쳐보자! 25주년 맞은 K팝의 전설 보아
‘아시아의 별’ 성공과 함께 늘 따라다녔던 안티
편견과 맞서 싸우며 명불허전 ‘K팝 전설’로…
이수만·유영진 품 벗어난 첫 앨범 ‘크레이지어’
젊은 창작가들과 자유로운 소통 속 11곡 탄생
상처 딛고 이룬 음악적 성장…관록의 힘 보여줘
베테랑 인디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는 그들의 대표곡 ‘졸업’에서 이렇게 당부했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K팝의 현재진행형 역사, 베테랑 중의 베테랑 보아는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정규 11집 ‘크레이지어(Crazier)’의 동명 타이틀곡에서 당당하게 외친다. “미친 세상이야. 난 다 겪어봤거든. 근데 그거 알아? 난 더 미쳤어.”
보아가 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수없이 많다. 우선 오랜만의 복귀다. 정규 앨범으로는 2020년 10집 ‘베터(Better)’ 이후 5년 만에, 앨범 단위로는 2022년의 ‘포기브 미(Forgive Me)’ EP 다음 3년 만에 돌아왔다. 그 가운데 20주년 기념 공연과 한국 오리지널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수많은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음악의 갈증은 역시 음악만이 채울 수 있다. 한·일 도합 스무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한, 쉼 없이 창작에 몰두하는 보아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은 아이콘으로의 군림보다 현역이라는 자부심이다. 이 철학만큼은 굳건히 보아의 경력을 지탱하고 있다.
공백기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다. ‘크레이지어’는 보아의 경력에서 이수만과 유영진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첫 번째 정규 앨범이다. 창업주와 그의 최측근이자 SM의 음악을 완성한 프로듀서가 회사를 떠났다. 이들과 함께 만 13세 나이로 데뷔해 갖은 고초를 극복하고 한류 역사를 개척한 보아에게는 낯선 도전이다. 새로운 창작의 경로를 마련하고 굳은 다짐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결심은 쉽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보아는 아티스트로서도, 인간적으로도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 엠넷 오리지널 댄스 시리즈의 심사위원 참가 결정은 ‘베터’의 역주행 인기를 이끌었으나 도를 넘는 악성 댓글은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 한숨 고르려 할 때 회사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숱한 논란과 가십이 작은 휴식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슈퍼스타가 감내해야 할 인기의 무게라며 넘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돌아보면 보아는 언제나 달갑지 않은 시선을 감당하고 편견에 맞서 싸우며 이 자리까지 왔다. 보아는 K팝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안티 팬에게 시달린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데뷔 전 초등학생 시절부터 1집 ‘아이디: 피스 비’로 데뷔하기까지 신인 음악가에게 쏟아졌던 비난과 저주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본에서의 대성공과 금의환향 이후에도 대중은 보아를 고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가요계에 흔치 않은 여성 솔로, 어린 나이로 한류 열풍의 중심에 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역사적인 인물, 회사의 핵심이라는 여러 지위가 음악가의 창작 세계를 가렸다. 그가 앨범 모든 곡의 작사 작곡을 도맡고 프로듀싱까지 맡을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K팝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이자 무대를 장악하는 퍼포먼스로도 최고 수준을 다툰다는 사실은 당연한 능력처럼 여겨지지만, 결코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소녀시대 효연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보아가 SM의 프로젝트 ‘걸즈 온 탑’의 첫 번째 유닛 갓 더 비트(GOT the beat)에 관한 세간의 오해를 고백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난해한 콘셉트와 노래를 지시한 이들은 따로 있음에도 악성 팬들은 보아를 탓했다. “나는 하고도 욕먹네….” 거듭되는 증명의 요구 가운데 인간적으로 지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아가 올해 취중 라이브 방송 이후 팬 커뮤니티에 공유한 심정 고백은 그의 가장 깊은 진심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일뿐 아니라 사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겪어 왔다 (···) 세상도 바뀌고, 저도 변하고, 그 변화들이 동시에 밀려오면서 ‘이 자리가 내가 서 있을 곳이 맞는 걸까’ 고민을 수없이 반복하게 됐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던 순간들 속에서도 여러분과 음악이 있더라.” ‘크레이지어’의 보아는 음악에 미치며 자신을 치유한다. 그를 동경하며 산업에 뛰어든, 그의 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위상만큼은 체감하고 있는 젊은 창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긴 경력 가운데 소통하며 함께 음악을 만들어온 이들과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며 앨범에 수록할 11곡을 골랐다.
보아는 과감하게 신보의 포문을 연다. 컨트리팝 구조 위에 거친 일렉트릭 기타 연주의 펑크록을 깔고, 곡에 호응하듯 초창기 경력을 연상케 하는 허스키한 탁성으로 노래하는 타이틀곡 ‘크레이지어’다. 대표곡 ‘걸즈 온 탑’의 무대처럼 남자 댄서 위에서 내려와 공격적인 메시지로 지지 않겠노라 선언하는 전설의 무대를 보며 보아가 추억을 현실로 이어갈 수 있는 아티스트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보아가 라이브 방송을 통해 최근 만든 노래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라 소개한 이유가 있다. 이토록 후련하게 외쳐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앨범은 안정적이다. 믿고 듣는 보아의 정규 앨범이다. 8분의 6박자 진행이 독특한 1980년대 스타일의 댄스 팝 ‘힐링 제너레이션’과 발리에 펑크 ‘힛 유 업’, 도회적인 다크 팝 ‘왓 쉬 원츠’ 등이 공연장에서의 보아를 그려보게끔 만든다. 귀에 들어오는 멜로디 진행이 돋보이는 ‘잇 테이크스 투’와 감각적인 기타 연주로 시작하는 차분한 알앤비 ‘하우 쿠드’는 처음으로 자작곡을 타이틀에 세운 7집 ‘온리 원’과 모든 곡을 자작곡으로 채웠던 8집 ‘키스 마이 립스’를 연상케 한다.
개별 곡의 완성도와 멜로디 감각은 지난 10집이 더 우월하지만, 앨범 단위 일관성 있는 프로듀싱 부분에서 사반세기 이후 계속될 거장의 경력을 암시하는 역할로 ‘크레이지어’는 분명한 가치가 있다. 무릎 급성 골괴사 수술로 앨범 활동 및 콘서트가 취소돼 무대 위에서 새 앨범의 노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마침내 난 꿈을 이뤘죠. 넘어진 만큼 더 높이 뛸 수 있었죠….” 정규 10집을 마무리한 ‘리틀 버드’의 감격을 뒤로 한 채 보아는 다시 창작에 몰두한다. 앨범을 마무리하는 ‘클록와이즈’ 속 “바삐 서두르진 않으려 해”라는 노랫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재촉할 이유가 없다. 보아가 걸어갈 길은 앞으로도 까마득하게 길다. 모든 K팝 아티스트들이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있다. 전설의 광기(狂氣)를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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