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기술 통째로 탈취하는 국적 세탁 위장회사
인수합병으로 사들이거나 직접 설립, 현지 기술자 채용
중요 프로젝트 수행하게 하고 관련 기술 자국에 빼돌려
국내 반도체 전문가들 中서 회사 세워 기술 유출하기도
국가 경쟁력 저해뿐만 아니라 안보와도 직결 주의해야
산업스파이 활동은 고대에 도자기를 굽는 유약 제조법을 두고 벌어진 정보전에서부터 진화해 산업화 시대의 유리, 철강, 방적기 제조 등 신기술 획득 과정에서 국가 차원의 활동으로 발전했다. 현대에 와서는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만큼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설계도와 생산 공정 등 모든 기술 자료가 디지털화돼 복사된 형태로 흔적도 없이 기술을 훔쳐 갈 수 있게 되면서 산업스파이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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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스파이 활동의 획기적 진화
기술 전쟁 시대를 맞아 내부자 포섭을 통한 자료 유출, 인력 스카우트 등 전통적인 방법 외에 해킹을 통한 직접 탈취, 기술 컨설팅을 위장한 정보 수집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최근에는 인수합병(M&A)으로 기업을 사들여 기술력을 통째로 접수하는 방법까지 동원되고 있다.
각국은 외국 자본의 자국 기업 인수 시 이를 국가 안보적 관점에서 심사하는 위원회를 설치해 거래 자체를 막거나 취소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대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기술 탈취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지난 3월 말 국가안보 관련 범죄를 수사하는 대만의 법무부 조사국에 따르면 중국의 11개 회사가 싱가포르, 사모아 등 서방 국적으로 세탁하거나, 대만 기업인 것처럼 위장해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첨단 기술 인력을 채용해 자신들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하고, 관련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렸다. 그중에는 중국에서 가장 큰 반도체 회사인 SMIC도 포함돼 있는데, 이 회사는 태평양의 미국령 섬나라인 사모아에 위장회사를 설립한 후 2010년 외국 자본 명의로 대만 북부 신주지역에 자회사를 설립해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우수한 기술자들을 채용했다고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만 반도체 제조 기술력을 중국 기업이 현지에 진출해 직접 활용하고, 이 과정에서 입수한 첨단 기술은 중국으로 빼돌린 것이다. 지난 6월 중순, 대만 경제부 국제무역국이 중국의 IT 대기업 화웨이와 함께 SMIC를 수출통제 대상 블랙리스트에 정식으로 포함한 이유다.
적발된 또 다른 중국 반도체 설계 및 개발 전문회사 STMT는 2023년 중국 산업정보통신기술부로부터 혁신 강소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실은 비밀리에 대만 내 두 곳에 사무실을 두고 본사 임원이 온라인 면접을 통해 첨단 분야 연구원들을 선발해 왔다고 한다. 이들 위장기업은 중국 관련성을 숨기고 인력을 채용했기 때문에 고용된 대만인 기술자들은 중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국적 세탁 위장회사 앞세워 기술 탈취
이번 사례처럼 기술 보유 국가에 위장회사를 설립, 현지 기술자를 채용해 앞선 기술력을 직접 활용하고, 기술을 훔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전례를 찾기 힘든 사례다. 대만이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제조 기술 기업인 TSMC를 보유한 반도체 기술 강국이라는 점과 중국과 대만이 같은 민족으로 언어·문화가 유사한 특별한 관계라는 점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기술 탈취는 제조업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반도체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반도체 굴기’까지 내세우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는 첨단 반도체의 중국 수출을 금지한 미국의 제재를 회피할 최고의 방안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기술 유출은 대만인들이 중국의 반도체 기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대만의 기술 경쟁력을 상실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대만 침공을 기도하고 있는 자신들의 주적을 돕는 것이나 다름없어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중국의 위장회사 설립을 통한 대만 기술 탈취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9월에도 8개의 중국계 기업이 외국 자본 유치 형식으로 위장회사를 설립해 고액 연봉으로 우수 엔지니어들을 대거 채용한 사실이 적발됐다. 이들 기업은 반도체 장비, 3세대 반도체 설계 등 핵심기술 분야 인력을 집중적으로 채용했다. 중국 반도체 장비 분야 유력 기업인 ‘북방화창(NAURA)’이 대만에 가짜 법인을 설립한 후 연구개발 인력 채용을 시도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대만은 TSMC가 지킨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도 대만의 반도체 제조 기술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필요로 하기에 중국의 침공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적 확신 때문이다. 이는 반도체 기반의 국가안보 전략 개념인 ‘반도체 방패’라는 뜻의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라는 용어로 일반화돼 이미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만은 2022년 국가보안법을 개정해 반도체 핵심기술을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하고, 유출 자체를 경제 스파이 행위로 강력 처벌하는 일명 ‘TSMC 조항’을 신설했다.
대만과 더불어 반도체 강국인 우리나라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임원급 반도체 전문가가 중국에 회사를 설립하고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체포됐다. 중국 지방정부로부터 4600억 원이라는 거액을 지원받아 중국 칭다오에 회사를 설립한 후 삼성과 SK하이닉스 출신 반도체 전문가 200여 명을 채용하고, 수백만 건의 기술 자료를 빼돌린 것이다. 국내에 위장회사를 설립한 경우는 아니지만, 직접 회사를 설립하고 대규모 기술 인력을 채용한 것은 같다.
대만이 사건 이후 외국 자본이 설립한 회사들에 대해 자금 출처를 엄밀하게 추적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외국 자본에 의한 민감한 기술 분야 회사 설립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같은 수법의 기술 유출을 우리는 아직 적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술이 나라를 지킨다!
‘산업기술 유출(Industrial Espionage)’이라는 키워드가 포함된 국내외 언론 보도의 경향성을 파악한 최근의 한 연구(김가빈·강현구, 2024,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산업기술 유출 관련 국내외 언론보도 경향 연구)에 따르면 해외 언론에서는 기술 유출로 인한 경제적 여파와 중국과의 갈등에 관한 보도가 주를 이룬다. 반면, 국내 언론에서는 수사 및 처벌, 법·제도 등의 문제점을 주로 다뤘다고 한다. 그만큼 국내에서는 기술 유출과 관련한 제도와 양형 등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살인, 강도와 달리 인명 살상과 관계없는 경제 범죄를 가볍게 보는 국민 정서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외국으로의 기술 유출이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고 안보와도 직결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법원의 판단이 국민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서둘러 국민 인식 개선에 나서야 한다. 미국의 국가방첩보안센터(NCSC)와 연방수사국(FBI)이 산업스파이 행위에 대한 경제 방첩 활동 자체는 물론이고, 기술 유출을 포함한 외국의 정보적 위협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 제고를 자신들의 중요한 임무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 교육, 홍보, 정보공유 등을 통해 국민의 산업 보안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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