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실어나른 건 비단 아닌 관습…국경 넘어 삶을 바꾸다

입력 2025. 07. 28   16:13
업데이트 2025. 07. 2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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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 - 비단과 말발굽, 옷을 나르다 (상)

기원전 2세기 한나라, 초원·바다 통해 한반도·日에도 옷과 기술 전해
몽골제국 말길은 가죽옷·모피기술 전파해 유목민 실용성 더한 복식 알려
고급 직물로 외교, 문화 교류…닮은 듯 다른 한·중·일·몽골, 하나로 엮어 

 

먼 옛날, 비단이 길을 만들었다. 그 길 위로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는 가죽과 모피를 실어 나른다. 비단과 말을 세는 단위는 ‘필(匹)’이라 하는데, 이는 비단과 말을 한 필로 맞바꾼 시대의 흔적이다. 비단이 만든 길은 사람들이 입는 옷을 바꾸고, 그 삶까지 바꿔놓았다.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천이 아니었다. 옷은 삶의 방식이었고, 사회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입는 옷, 쓰는 말, 지키는 관습이 어디서 왔는지를 두 편에 걸쳐 한국·중국·일본·몽골 네 민족공동체가 서로 엮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드라마 '상의원'(2014)포스터. 철릭을 입고 있는 왕(유연석 분). 필자 제공
드라마 '상의원'(2014)포스터. 철릭을 입고 있는 왕(유연석 분). 필자 제공


한나라의 비단, 고구려의 갑옷 

비단의 고향은 중국 한나라(漢)다. 비단이란 본래 명주실로 짠 붉은 빛의 두꺼운 천을 의미한다.

기원전 2세기 장건이 개척한 서역길은 비단길(Silk Road)로 불렸다. 서쪽으로 다양한 문화권과 교역하던 한나라 사람들은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뽕잎과 누에, 베틀로 만든 이 반짝이는 천을 초원과 바다를 통해 한반도와 일본에도 판매했다. 일본 야요이 시대 유적에서도 한나라 비단이 나왔다. 이미 이때 바닷길과 초원길로 옷과 기술이 오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몽골 초원도 옷이 흐르던 또 다른 길이었다. 흉노와 선비(鮮卑) 등 유목민족은 기마전에 맞는 가죽옷과 모피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 기술은 고구려와 부여에도 들어왔다. 가죽은 추위를 막고 갑옷 재료로도 썼다.

특히 삼국시대 한반도는 이 영향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고구려 고분 벽화 속 무사들은 철과 가죽으로 만든 갑옷 위에 비단 띠를 둘러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함께 담았다. 신라 귀족은 연꽃과 구름 문양이 있는 옷을 입었다. 백제는 일본 아스카 시대 문화에 큰 영향을 줬다. 백제 장인들은 일본에 직조, 염색, 자수와 함께 관복 제작 기술까지 전했다. 이때 옷은 단순한 수입품이 아니었다. 기후와 지형, 전쟁과 교류가 빚어낸 결과였다. 사람들은 옷을 바꾸며 새 환경에 적응했고, 옷은 그들의 삶을 다시 바꿨다.


일본 쇼토쿠태자의 조복(朝服), 백제 장인의 손길

일본의 관복은 한반도에서 건너갔다. 7세기 초 아스카 시대, 왕족이자 정치가인 쇼토쿠태자는 관위십이등제(冠位十二等制)를 시행했다. 관모와 옷 색깔로 관료 서열을 구분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기술이 보인다. 백제 장인들은 일본에 직조와 염색, 자수를 전하며 옷의 고급화를 가능하게 했다. 오사카에 있는 시텐노지 유적 출토 직물에서 백제식 무늬와 염색 기법이 확인된다.

당시 일본 왕실과 귀족은 백제의 비단과 금속공예를 선호했다. 이는 일본 초기 귀족 사회가 의복으로 권위를 표현한 방식과 맞닿아 있었다. 옷 색상, 장식 문양, 소재는 신분의 상징이자 정치 질서의 표식이었다.

이 시기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단순한 기술 전수가 아니었다. 백제는 일본에 고급 직물을 보내 외교적 유대를 강화했고, 일본은 이를 통해 왕권의 권위를 시각화했다. 옷은 권력과 외교, 그리고 문화 교류가 얽힌 매개체였다.


드라마 ‘마르코 폴로’(2014)에서 몽골 전통의복 델을 입고 있는 쿠빌라이 칸(베네딕트 웡 분). 필자제공
드라마 ‘마르코 폴로’(2014)에서 몽골 전통의복 델을 입고 있는 쿠빌라이 칸(베네딕트 웡 분). 필자제공


몽골제국 복식의 확산

13세기에 번영한 몽골제국은 서역과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광대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은 초원과 도시, 사막과 해안을 잇는 말길을 통해 군사와 상인, 장인과 기술을 이동시켰다. 이 길 위에는 비단뿐만 아니라 몽골의 옷과 생활양식도 전해졌다.

몽골의 전통 의복인 델(Deel)은 그 대표적 예다. 델은 긴 소매와 넉넉한 품으로 기마에 적합했고, 허리띠를 매어 활동성을 높였다. 재질은 계절에 따라 다르게 썼다. 여름에는 면과 얇은 비단, 겨울에는 모피와 양모를 덧댔다. 델은 군사의복뿐만 아니라 일상복으로도 쓰였다. 금으로 수놓은 머리띠와 금속 단추, 그리고 가죽 장식은 귀족 계층의 권위를 표현했다.

몽골제국 극동지역이었던 원나라(元)는 한반도를 다스리던 고려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두 정권의 왕실과 지도층은 몽골식 델을 변형한 ‘철릭(天翼: 무관이 입던 공복으로 허리에 주름이 잡히고 큰 소매가 달림)’을 전장과 일상에서 즐겨 입었다. 철릭은 긴 소매와 여밈 방식, 허리 조임이 델과 닮았고, 후대 한복에도 이 요소가 스며들었다.

일본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1274년과 1281년 있었던 쿠빌라이 칸의 두 차례 원정은 일본 사회에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치하로, 사무라이 계층이 주도하던 시기였다. 두 차례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우수한 몽골군의 무기와 장비는 일본에 새로운 전술과 의복 구조를 전했다.

몽골 기병은 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벨트를 둘러 기동성을 확보했다. 이들은 팔과 가슴을 보호하는 가죽 또는 철판을 엮어 만든 갑옷을 착용했다. 일본 무사들은 이 구조에 주목했고, 이후 오이요로이와 도마루 같은 전통 갑옷을 더 경량화하고 보호 부위를 수정하며 말 위는 물론 기동 측면에서의 움직임을 개선했다.

의복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일본 귀족사회에서는 몽골풍 모피 장식과 가죽 벨트가 일시적 유행이 됐다. 원정 이후 귀족과 무사들 사이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몽골식 모피 관모와 가죽 장식품이 신분의 상징처럼 소비됐다. 특히 귀족 여성 사이에서는 비단 안감에 모피를 덧댄 외투가 고급 의복으로 선호됐다.

몽골군의 복식과 장비는 일본에 공포의 기억을 남겼지만, 동시에 실용성과 장식을 겸비한 그들의 의복은 일본 무사계급의 복식 문화에 새로운 자극을 줬고, 가마쿠라 후기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서서히 영향을 줬다.

몽골제국 복식의 확산은 단순한 옷의 전파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유목민의 기동성, 상인들의 무역로, 원나라 궁정의 화려함 등 복합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었다. 옷은 초원과 도시의 문화를 함께 담은 매개체였다. 이때 의복은 신분 표시를 넘어 당시 인간 삶의 질서를 보여준다.


옷은 국경을 넘고 문화를 엮었다 

한나라의 비단길과 몽골의 말길, 바다를 건너던 상인의 배는 옷과 사람, 생각을 함께 옮겼다.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린 천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배와 저항, 동화와 변주의 기록이었다. 비단의 광택과 가죽의 질감은 각기 다른 땅의 기후와 사회 질서에 맞게 다시 변화했다.

이 시기의 동아시아는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 한반도, 중국, 일본 열도, 몽골 초원을 살았던 선조들은 옷을 통해 서로를 알았고, 서로를 바꿨다. 문화는 강요와 선택 사이에서 흘렀고, 이후 서구에서 불어온 근대화 바람이 도래하기 전까지 그들이 입었던 복식으로 남아 있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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