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군 생활의 반환점을 돌았다. 그동안 좋은 사람들 속에서 무사히 지내왔다는 것에 안도하고 감사하면서도, 어느 순간 초심을 잃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자책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훈련하고 있으면 저절로 짜증이 올라온다. 전우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존재하지만 탓하는 말이 앞설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지금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억압에 맞서 싸우며 나라를 지켜낸 순국선열을 떠올려 보곤 한다.
부끄러운 탓일까. 우리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구구단 외듯 줄줄이 읊던 모습은 사라지고 한 박자 더 생각한 뒤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숭고함의 무게를 잴 수 있는 마음의 저울이 생겨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말 보따리를 다시금 머금을 수 있는 내적 성숙을 이뤄낸 것이다.
훈련 중 모두가 한데 모여 식사하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전투식량을 먹으며 냉정한 맛 평가를 해본다. 추운 날 밖에서 별을 보며 먹는 된장국 맛에 감탄하고, 전투복에 밴 양념꽁치 냄새에 코를 잡고 웃기도 하며, 더 맛있게 먹는 저마다의 방법을 공유하며 이야기꽃을 피워본다.
고된 훈련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상황이지만 어느 순간 한층 가까워진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문화라는 이름의 다리로 개인 간 거리가 좁혀진 순간이다. 갈등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와 단결의 시발점이 되는 ‘문화’. 우리는 문화의 그 숭고한 힘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우리말을 사용하며 집단 안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익숙한 우리 음식을 먹으며 그 맛의 좋고 나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음에 기뻐해야 한다. 사회적 참사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리며 추모하고,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를 빛내는 스타들의 성취를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어야 한다.
고 이어령 교수는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지도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문화를 알아야 한다”며 “그 사람만 보면 즐겁고, 그 사람이 말하면 어려운 일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절로 우러나오는 힘은 금전과 권력이 현실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도 돈과 권력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말했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지금,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우리 공동체의 기틀을 세운 선조들이 현대의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일까. 높은 문화의 힘이야말로 우리가 오래도록 간직해야 할 선대의 유산이 아닐까. 서로의 이야기를 충실히 듣고 사랑하는 법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문화가 다시금 대화의 장을 열어줄 수 있는 해결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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