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을 계승하다
연필 대신 총 들고 떠난 길
1950년 7월 13일 이렇다 할 교육도 없이 전선에 투입됐지만 두렵기보단 당연했다 나라 위한 일이기에…
대한민국 존망 최전선을 걷다
수없이 넘은 죽음의 고비를 증명하듯 몸의 일부로 남은 그날의 총상
혹한에 언 주먹밥 먹으며 포탄을 지고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나라를 지켰다
자연스럽게 스민 용사의 삶
귀 기울이며 듣던 전쟁 이야기 눈으로 보며 자란 할아버지 훈장
인생 방향이 된 참전용사의 삶 손자가 선택한 군인의 삶은 어쩌면 물 흐르듯 당연했다
물려받은 유산, 강한 정신력
체력만큼 중요한 게 정신력 전투에서 버티는 힘이 나와 전우를 지켜준다 배워
할아버지의 유산 이제 부대원에 전한다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라 없이는 나도, 우리도 없다”. 6·25전쟁 참전용사 박천석 옹은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했다. 그는 겨우 열여덟의 나이로 전쟁터로 향했다. 그리고 75년이 지난 오늘 그의 손자는 육군특전사 휘장을 달고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의 삶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아래 굵은 줄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글=송시연/사진=양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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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Z 세대가 보내는 존경과 감사
6·25전쟁이 발발한 지 19일째 되던 1950년 7월 13일. 참전용사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을 품고 집을 나섰다. “그땐 나만 간 게 아니었어. 친구들과 함께였지. 연필 대신 총을 들었어. 두렵기보단, 그게 당연했지.”
이렇다 할 교육도 없었다. 국군 7사단 3연대 12중대 소속으로 일주일간 기초훈련만 받고 전선에 투입됐다.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한 포항지구전투부터 다부동전투, 안강·기계전투까지. 참전용사가 지나온 길은 대한민국의 존망이 걸린 최전선이었다.
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류탄을 손에 쥔 채 돌격했다. 함께했던 8명의 전우 중 살아남은 건 자신을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남은 일곱 명은 다 그 자리에서 전사했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 죽음의 고비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1951년 충북 제천전투에서는 왼쪽 팔과 오른쪽 복숭아뼈에 총상을 입었다. 팔에 있는 총탄은 지금도 남아 있다. 당시 의학 기술로는 제거가 불가능했고, 이제는 몸의 일부가 됐다.
적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가던 중 죽음 힘을 다해 탈출했던 기억도 있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끌려가고 있었는데, 논길에서 트럭이 고장 난 거야. 죽기 살기로 달렸지.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던 순간, 미군을 만났어. 순간 아군이라고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South! South!’라고 소리쳤지.”
미군에 인계됐지만, 남한 병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수일 동안 심문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한국인이었던 담당자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신원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참전용사는 그렇게 살아남은 후에도 “원하는 것이 있냐?”는 담당자의 물음에 “군복을 입고 싶다”고 했다. 새 군복을 입은 그는 전선으로 돌아갔다. 포탄을 등에 지고 평양까지 걸었고, 혹한 속에 언 주먹밥은 대검으로 잘라먹었다. 허기질 때는 논밭의 눈을 손으로 퍼먹으며 버텼다. 그렇게 나라를 지켰다.
참전용사의 손자인 육군특수전사령부 귀성부대 이정민 대위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외갓집에 놀러 가면 외할아버지가 6·25전쟁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왠지 모르게 귀를 기울이며 집중했습니다. 생생한 전투 경험담은 어린 저에게도 전쟁의 참상을 떠올리게 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방 한 편에는 훈장(충무은성무공훈장)이 전시돼 있었는데, 볼 때마다 숙연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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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의 삶은 그렇게 이 대위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군인의 길을 택한 것도 할아버지의 영향이다. 이 대위는 2017년 3월 학군장교로 임관했고, 6년간 복무 후 전역했다. 하지만 사명감을 잊지 못해 지난해 6월 다시 군문에 들어섰다. “돌아보면 제 삶 전체가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자랐고, 방향을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제 삶에서 할아버지의 영향이 없는 부분은 없더라고요.”
강인한 정신력도 이어받았다. “할아버지는 항상 체력만큼 중요한 게 정신력이라고 강조하셨어요. 전투에선 끝까지 버티는 힘이 결국 나와 전우를 지켜준다고 하셨죠. 그래서 병과도 ‘정신전력’을 다루는 정훈병과를 택했고, 지금은 정훈참모로 할아버지에게 배운 정신력을 부대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참전용사는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유는 그냥 있는 게 아니야.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야 생겨나는 거지. 당연한 게 아니야. 목숨으로 지켜낸 거야. 나라가 있으니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거야.”
참전용사는 전역 후에도 참전유공자회, 무공수훈자회, 상이군경회에서 활동하며 국가안보와 자유·평화의 소중함을 전했다. 이 대위는 그런 할아버지와 수많은 참전용사의 헌신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참전용사 배지를 단 어르신들을 거리에서 마주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립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전장의 풍경은 달라졌다. 그러나 조국 수호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피와 땀으로 지켜낸 자유의 가치는 오늘도 두 사람을 잇는다. 한 사람은 과거의 대한민국을, 또 한 사람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나란히 말했다. “어떤 순간이 와도 대한민국을 지킬 것”이라고.
박천석 옹, 귀성부대 장병과 대화
감사의 경례…노병은 활짝 웃었다
“영웅께 대하여 경례! 단결!”
지난 17일 육군특수전사령부 귀성부대. 아흔을 넘긴 노병이 장병들 앞에 섰다. 참전용사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거수경례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 참전용사인 박천석 옹과 귀성부대 장병들이 깜짝 만남을 가졌다. 귀성부대는 참전용사의 손주인 이정민 대위가 복무하는 곳이다.
경례가 끝난 뒤 참전용사와 장병들 사이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 대위의 눈시울도 살짝 붉어졌다. 우렁찬 경례로 화답한 용사는 “대한민국을 지켜줘 고맙다. 여러분들이 있어 든든하다”면서 “나라가 있어야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있어서 나라가 있는 건 아니다. 이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전용사는 자신이 참전했던 6·25전쟁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켰는지 들려줬다. 장병들은 참전용사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만남이 끝난 후에는 장병들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참전용사에게 꽃다발도 건넸고, 노병은 활짝 웃었다.
박부겸 일병은 “먼 이야기로 느껴졌던 6·25전쟁이 누군가에는 이렇게 생생한 기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평범한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선배님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존경과 감사함을 잊지 않고 군 복무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지성 중사는 “전장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젊음을 바친 참전용사를 실제로 뵙고 생생한 전투 경험을 들어 의미 있었다. 지금의 자유·평화가 선배 전우들의 피와 땀, 희생·헌신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이제는 우리가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하며 위국헌신 정신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만남은 단지 세대 간의 만남이 아닌, 대한민국 국군의 과거와 현재가 마주 선 순간이었다.
이들의 경례는 세월을 뛰어넘은 경의였고,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에 대한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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