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실험한! AI로 완성한? 그것이 문제로다

입력 2025. 06. 02   15:52
업데이트 2025. 06. 0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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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보이스 오브 햄릿’

AI 분석·제안에 사람의 감각 더해 완성…보조 도구 넘어선 창작의 진화
주변 서사 배제하고 햄릿 내면에만 집중…감정 시각화한 ‘경험하는 무대’

햄릿 역 배우 신성록
햄릿 역 배우 신성록



뮤지컬 ‘보이스 오브 햄릿: 더 콘서트’(이하 ‘햄릿’)는 태생부터 도발적이었다. 인공지능(AI)과 인간의 협업, 록 콘서트 형식, 단 한 명의 배우가 이끌어 가는 1인극 구성, 젠더프리 캐스팅까지. 이 작품은 뮤지컬이라는 장르 안에서 어디까지 실험이 가능한지를 밀어붙이며 무대에 올려졌다.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 중인 ‘햄릿’은 그 자체로 창작의 진화를 외치는 상징과도 같다.

작품 정보는 간결했다. 죽은 후에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400년 넘게 악몽 속을 떠도는 햄릿이 스토리의 중심. 햄릿과 주변 인물들의 갈등이나 서사는 배제되고 오로지 햄릿 개인의 내면과 감정의 격동에 집중한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뮤지컬 팬이라면 익숙할 이름, 아트디렉터 오필영이 설립한 제작사 이모셔널씨어터의 ‘더 보이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무대는 오직 한 명의 배우를 위한 공간으로 설계됐다. 미로처럼 배치된 LED 패널, 감정에 반응하는 조명, 록 사운드에 태워진 음악까지 모든 요소가 ‘햄릿의 내면’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돼 있다. 1인 콘서트 형식이라는 설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공연을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직접 ‘경험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창작 과정에 AI가 개입했다는 것이다. 이모셔널씨어터가 자체 개발한 ‘AI 기반 창작 시스템’이 ‘1인극’과 ‘콘서트’라는 콘셉트에 맞춰 영문 트리트먼트를 생성하고, 감정 패턴 분석을 통해 멜로디와 코드 진행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렇게 도출된 결과물 위에 창작진의 예술적 감각과 해석이 더해져 대본과 음악이 완성됐다.

설명은 복잡하게 들리지만 기본 틀을 AI에게 제시한 뒤 AI가 만들어낸 수많은 결과물 중 창작진이 선택하고 재주문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한 끝에 ‘햄릿’이 탄생한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AI가 단순한 보조 도구를 넘어 예술적 실험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해답의 실마리를 던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래서일까. ‘햄릿’의 넘버들은 낯설지 않지만 또 완전히 익숙하지도 않다. 기존 뮤지컬 스타일과 록음악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가 느껴진다. AI 기술이 기반이 된 구조답게 예측 가능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인간 창작자의 감정이 덧입혀져 있다. 관객의 새로운 감각을 깨우려는 의도가 공연 전반에 고르게 배어 있었다.

다만 음향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일부 구간에서 연주 사운드가 배우의 목소리를 덮어 가사 전달이 흐려졌고, 딕션이 명확하지 않은 장면에선 이야기가 뚝 끊기는 느낌도 받았다.

 

햄릿 역 배우 옥주현
햄릿 역 배우 옥주현



기억에 남는 넘버가 있다. 다섯 번째 곡 ‘가까이, 좀 더 가까이’는 햄릿의 불안과 고립, 사랑과 복수 사이의 혼란을 강렬한 리듬에 실어 밀도 있게 전달했다. ‘결투’는 원작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를 압축한 장면으로, 빠른 비트 속에서 햄릿의 분노와 체념이 교차된다. 두 곡 모두 록 뮤지컬 성격을 송곳니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햄릿’은 요즘 뮤지컬계에서 은근한 트렌드로 자리 잡은 젠더프리 캐스팅을 채택했다. 남자 캐릭터인 햄릿 역에 남성뿐 아니라 여성 배우까지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 작품에서는 신성록, 민우혁, 옥주현, 김려원이 햄릿을 맡았다.


옥주현의 햄릿으로 보게 됐다. 중성적 이미지의 캐릭터를 여러 차례 소화해온 옥주현은 이 작품에서도 이질감 없는 햄릿을 구현했다. 그는 노래로는 깔 데 없는 배우이자 가수다. 하지만 록이라는 장르와의 조응은 다소 어색했다. 중저음은 풍부했고 고음도 탄탄했지만, 록 특유의 날선 질감이나 저항의 에너지는 좀처럼 만져지지 않았다. 이른바 ‘옥주현류’의 둘도 없는 음색이 오히려 장르적 어긋남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20년 넘게 뮤지컬 무대에 서온 옥주현에게도 이번이 첫 1인극이다.

대사 장면에서는 ‘역시 옥주현’이라 할 만큼 감정선이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특히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며 ‘햄릿이 미쳤다는 소문을 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콘서트와 연극의 경계를 허무는 듯한 실험이 빛났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민우혁의 햄릿도 꽤 궁금해졌다.

무대 밖에서도 AI에 대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일뿐만 아니라 손을 델 듯 뜨겁다. AI가 인간 고유의 감성과 창작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불안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햄릿’은 그 우려에 대해 ‘전면 수용’이 아니라 ‘조건부 실험’으로 응답한 작품이다. 인간의 감정이 여전히 무대의 중심에 있고, AI는 그 흐름을 정리하거나 낯선 제안을 던지는 조력자로 기능할 때 둘의 공존은 설득력을 얻는다. ‘햄릿’은 그 가능성을 입증한 첫 번째 모델로 기록될 것이다. ‘보이스 오브 햄릿’은 무대 위에 칼날로 새긴 듯한 한 줄의 실험선을 그었다. 그 선이 균형이 될지, 금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이 한 걸음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예술은 조금 더 용감해질 수 있게 됐다.  사진=이모셔널씨어터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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