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순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굴복했고, 주재소 책임자도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일제 사죄’였다.
버선에 숨겨 온 독립선언서 고종 인산식 참석 이석범, 몰래 갖고 와 동생·아들과 만세 준비…마을도 함께해 철저히 평화적인 만세운동 순사들에게 신체적 해 일절 가하지 않고 체포돼 옥고·태형…양양읍·논산리 확대 골목 밖으로 나와야 할 역사 지역 ‘자긍심’ 높인 공간으로 기억되고 양양까지 아우르는 ‘통합 기념관’ 바람
강원도 동해안의 대표적 관광지 속초시 대포항. 싱싱한 해산물과 사람들이 북적이는 횟집 골목 뒤편, 관광객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조용한 골목에는 ‘대포만세운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왜 하필 이곳에 기념관이 들어섰을까. 의아함을 안고 골목을 따라 들어서면, 여기가 바로 1919년 대포만세운동의 중심 무대였음을 알게 된다. 지금은 관광지에 가려 눈에 띄지 않지만 100여 년 전 이곳은 일제 경찰 주재소가 있던 자리이자 속초 주민들이 독립을 외쳤던 역사적 현장이다. 글=임채무/사진=조용학 기자
강원 속초시 대포항전망대에서 바라본 대포항 전경.
기념관 앞을 지나고 있는 시민.
속초 대포항의 역사와 대포만세운동
기념관은 먼저 속초와 대포항의 역사를 소개한다.
속초시청 김성남 해설사는 “대포는 ‘큰 포구’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며 “조선 말기 황실에서 운항하던 정기 기선이 중간 기항지로 삼으면서 항구도시로 성장했고, 1916년 도천면(현 속초시) 사무소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행정 중심지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1937년 면사무소가 속초리로 이전하면서 한때 쇠락했지만, 설악산 관광 붐을 타고 다시 동해안 대표 항구로 탈바꿈했다”고 덧붙였다.
대포만세운동 준비가 이뤄졌던 이종국 생가(현 속초 김종우 가옥).
1919년 1월 고종 황제의 승하와 함께 3월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은 속초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대포항 인근 중도문리에 살던 이석범은 고종 인산식에 참석했다가 독립선언서를 몰래 버선 속에 숨겨 귀향했다.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동생 이국범, 아들 이능렬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1919년 4월 3일 이들은 인근에 사는 이종황의 집에서 친목계를 가장해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일제가 눈치챌 것에 대비해 본격적인 준비는 뜻을 같이한 이종국의 집에서 이뤄졌다. 마을 책임자들은 이종국의 집에서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 준비를 마쳤다.
김 해설사는 “이 때문에 이종국 생가는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됐다”며 “다만 이름이 ‘속초 김종우 가옥’이라고 명명됐는데, 문화재로 등록할 때 현 소유주의 이름을 붙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기념관에는 이종국 생가의 모형이 전시돼 당시 만세운동 준비현장을 생생히 보여 준다.
기념관 앞에 설치된 대포만세운동 터 표지석.
1919년 도천면 지도. 대포리 순사주재소 위치가 현재의 대포만세운동기념관이다.
4월 5일 본격 전개된 대포만세운동
4월 5일 도천면과 강현면 주민들은 각자 태극기를 들고 대포리 순사주재소로 향했다.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순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굴복했고, 주재소 책임자도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일제 사죄’였다. 김 해설사는 “주민들이 일본 순사들에게 신체적인 해를 가하는 행위 등을 일절 하지 않았다”며 “평화적인 비폭력 만세운동을 펼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4월 6일 군중은 양양읍으로 이동해 만세운동을 이어 갔다. 일본군이 통행을 막으려 했지만, 군중은 이를 뚫고 읍내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17명이 체포돼 원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태형을 받은 이도 많았다. 4월 8일엔 논산리에서도 만세운동이 이어졌으나 군중은 면사무소 서기의 만류로 현장에서 만세만 부르고 돌아갔다. 하지만 일제는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일경에 체포된 이들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대포만세운동 당시 주요 사건 연표.
연표로 보는 만세운동, 전국사 속의 속초
흥미로운 점은 4월 5일 대포만세운동에 앞서 4월 4일 양양 장날에 4000여 명이 참여한 양양만세운동이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당시 도천면은 양양군에 속해 있었기에 두 지역의 만세운동은 긴밀히 연계됐다. 현재는 행정구역이 달라지면서 대포만세운동기념관에선 주로 속초 대포지역의 만세운동만을 집중 소개하고 있다. 김 해설사는 “양양 주민들이 기념관에 오시면 양양이 더 큰 규모의 만세운동을 했고 유공자가 많은데도 기념관이 없어 아쉬워한다”며 언젠가 두 지역을 아우르는 통합기념관이 생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념관 한쪽에는 ‘연표로 보는 만세운동’이 전시돼 있다. 고종 황제 승하(1월 21일), 3·1운동(3월 1일), 양양만세운동(4월 4일), 대포만세운동(4월 5일), 양양읍내 만세운동(4월 6일) 등 전국적 격변 속에서 속초 대포만세운동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났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대포만세운동은 군대가 동원될 정도로 손꼽히는 규모였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대포만세운동 주역들의 훈장과 그들의 활동을 기록한 일제 경찰의 조서.
대포만세운동 주역들의 공적을 기록한 전시물.
대포만세운동의 주역들과 남은 과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는 이석범, 이국범, 이재훈, 이재형, 이종국 등이 있다. 이들은 태극기를 제작하고 군중을 이끌어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국범은 도천면과 강현면 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1919년 7월 25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재훈은 이종국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4월 5일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벌였다가 징역 1년8개월 형을, 이재형 역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종국은 자기 집을 만세운동 준비 거점으로 제공해 고초를 겪었다.
이석범은 관직을 내려놓고 지역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교육에 힘쓰다가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일본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점, 일제강점기 이장으로 재직한 이력들로 친일행적 의혹이 제기돼 독립유공자 포상이 현재까지 보류되고 있다. 후손들은 여러 근거를 국가보훈부(보훈부)에 제시하고 있으나 기록의 신뢰성 문제로 유공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이석범만의 일이 아니다. 광복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 과정에서 6·25전쟁과 같은 큰일도 있었다. 공적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들이 이제는 다 흩어져 있거나 소실된 경우가 적지 않다. 보훈부가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에 힘쓰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보훈부는 객관적인 자료 부족으로 어려움이 있는 만큼 대국민 공개 검증 강화, 심사기준 명확화 등으로 투명성·신뢰성을 높일 계획이다. 또 세부 분야별 역사학자, 정치·법률 등 각계 전문가를 공적심사위원회 위원으로 구성해 전문성과 다양성을 확보할 예정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는 속초 충혼탑.
속초 독립운동 역사 알아주길
기념관은 2021년 8월 옛 대포항개발사업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개관했다. 외벽에는 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고, 내부는 하나의 전시실로 구성됐다. 만세운동의 순간을 담은 사진, 판결문, 태극기, 인물 소개, 이종국 생가 모형 등을 전시했다. 입장료·주차료는 무료이지만 주차장이 협소해 인근 공용주차장 이용을 추천한다.
속초시는 대포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속초사잇길’ 중 5길을 대포만세운동길로 지정, 기념관에서 설악해맞이공원과 대포항 제1주차장까지 이어지는 둘레길을 조성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며 동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100년 전 독립운동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취재 간 날은 평일 오전. 2시간 남짓 머무는 동안 방문객은 한 명도 없었다. 김 해설사는 “지역 학생들이 주로 방문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를 찾아 홍보하고 있다”며 “작은 기념관이지만 찾아오는 방문객을 위해 퍼즐 맞추기, 바람개비 태극기 만들기, 보석 태극기 키링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김 해설사는 “아직도 많은 이가 이 골목 뒤편에 이런 역사의 현장이 있는지 모른다. 접근성이 아쉽지만, 더 많은 홍보와 관심이 이어지길 바란다”며 “기념관에 더 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찾아 지역의 자긍심을 높이고,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