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설치와 활동
한·중·러·일 포괄 원동지역서 조직 착수
1930년까지 유능한 청년 약 150명 입단
이광수, 도산과 문답 과정 저서에 소개
정교한 논리·치밀한 분석 질문 이어져
상하이 유일 민족주의 학교 세워 후원
난징엔 유학생 위한 고등교육 학교도
억압 나선 일제, 재산 압수 결국 폐교
1920년 9월 20일 상하이에 정식 설치
도산은 1919년 9월 11일 임시정부 통합을 마무리하고, 1920년 새해를 맞으면서 중국·러시아·한국·일본을 포괄하는 원동(극동의 다른 말)지역 흥사단 조직에 착수했다. 흥사단 미주 본부에서 박선제(朴善濟)와 김항작(金恒作)을 불러 준비를 맡겼다. 인재를 아끼는 도산은 정직하고 유능한 청년들에게 흥사단 취지를 설명하고 입단을 권유했다.
1920년 2월부터 도산이 주관하는 입단 문답을 거쳐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박현환(朴賢煥)·김여제(金輿濟)·김공집(金公輯)·정상빈(鄭尙斌)·손정도(孫貞道)·김홍서(金弘敍)·유상규(劉相奎)·안정근(安定根) 등이 입단했다. 얼마 후 김구(金九)는 ‘특별단우’로 입단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내 모이명로 빈흥리 301호에 단소(회관)를 마련하고, 본부 승인을 얻어 9월 20일 정식으로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를 설치했다.
1920년 12월 29~30일 흥사단 제7회 연차대회를 상하이에서 열었다. 1922년에는 톈진과 베이징에서 김위택·주현칙·박일경·조영·이윤재·김산·이용설 등이 입단해 20여 명이 원동위원부 산하에 ‘천진·북경지부’를 결성했다. 이를 통해 1930년까지 원동지역에서 약 150명의 인재가 입단,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흥사단 입단 절차와 문답
흥사단에 가입하려면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을 위해 두 단계의 엄격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흥사단의 목적과 취지에 공감해 입단하려는 사람은 먼저 ‘입단 문답’을 통해 ‘예비단우’가 된다. 예비단우로 6개월 이상 ‘단우(團友)’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결심에 변함이 없으면 ‘서약 문답’을 받고 ‘통상단우’가 된다. 서약이란 평생 변치 않고 단우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약속이다.
이광수는 상하이에서 최초로 도산에게 입단 문답을 받고 입단한 인물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저서 『도산 안창호』에 문답 과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문답 과정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산파술)을 연상케 한다. 정교한 논리와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계속되는 질문에 답변자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가치관과 국가관을 새롭게 인식하고, 흥사단 운동이 구국(救國)을 위해 왜 필요한가를 깊이 깨닫게 된다.
이 무렵 도산이 진행하는 문답은 많은 시간 동안 이뤄졌고, 때로는 2~3일이 걸리기도 했다. 대답이 막히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고, 질문을 바꿔 올바른 답변을 유도하기도 했다. 입단하려는 사람이 흥사단의 취지·목적·활동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신중히 결심·선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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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학교와 동명학원
교육을 중시하는 도산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육기관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1920년 임시정부 산하에 체육학교 설립 승인을 받기 위해 공무국과 교섭한 기록(1920.1.15. 일기)이 있으나 실제로 설립됐다는 기록은 없다. 체육학교 형식을 빌려 군사훈련을 실시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성학교(仁成學校)는 1917년 2월 한인 거류민단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워진 초등학교다. 처음에는 기독교 교회 소속 사립학교였으나 1920년 상하이거류민단 소속 공립학교가 됐다. 그 후 학생은 50~70명으로 늘었다. 도산은 상하이 유일의 민족주의 학교인 인성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적으로 많은 후원을 했다. 교장과 교사는 선우혁·여운형·김태연·손정도·여운홍·이유필·조상섭·신언준·나창헌 등 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교민단체 간부를 지낸 인물이 맡아 봉사했다. 1921년 1월부터 약 6개월간 도산이 직접 교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교과목은 한국어와 한국사로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며, 그밖에 한문·외국어 등을 가르쳤다.
동명학원(東明學院)은 도산이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사업으로 1924년 3월 난징(南京)에 세운 학교다. 당시 베이징과 난징에는 국내에서 유학하러 오는 학생이 몰려들었다. 일제의 고등교육 억제 정책으로 국내에서는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일본 유학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학생들이 중국 혹은 서구 대학에 진학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외국어를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또한 난징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있는 곳이어서 청년 인재를 육성해 독립운동의 거점을 삼으려는 것이 장기적인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중국인 교회 건물 2층을 빌려 개원했으나 흥사단 미주 본부에서 보내온 820달러로 1500평의 토지를 매입해 학교 건물을 새로 지었다. 도산이 원장을 맡고, 기독청년학회의 목사 필립 질레트를 명예원장으로 초빙했다. 어학 과정은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고, 그 밖의 과목은 주로 흥사단 단원이 담당했다.
사전만(絲轉灣) 40호에 교사(校舍)가 완성된 후 동명학원은 3년 과정의 대학예비과를 설치하고, 방학 중에는 하기강습회를 개설해 어학과 고등교육 과목들을 가르쳤다. 대학예비과는 영어과와 중국어과로 나눠 해당 외국어를 철저히 이수하도록 했다. 일반 교과로는 국어, 영어, 국사 및 세계사, 지리, 수학, 과학, 경제학, 체육 등을 가르쳤다. 학생도 점차 늘어 40~80명이 됐다.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에게는 중국, 구미의 학교에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다.
동명학원은 장차 공과대학 과정을 설치해 정규 대학 과정까지 운영할 계획을 세웠다. 경제적 자립은 물론 독립운동을 후원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동명학원 발전을 위험 요소로 바라보던 일제는 동명학원을 억압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1926년 9월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해 교사와 교구가 모두 불타 수업이 일시 중단됐다. 하지만 곧 학교 재건을 위한 의연금 모금과 미주 흥사단의 지원으로 임시 교사를 마련, 1927년 4월 수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1930년대 접어들어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1938년경 도산 명의로 된 학교 재산을 모두 압수해 동명학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흥사단100년사』).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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