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와 부조리 그럼에도 더 빛난 두 노배우의 힘

입력 2025. 05. 20   16:25
업데이트 2025. 05. 2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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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1953년 프랑스 초연·1969년 노벨상 수상작
한없이 기다리는 고도, 존재·정의 해석만 분분
반복되는 구조·무의미하고 난해한 대사 판치지만
박근형·신구 두 명품 배우의 연기 그 자체로 의미 있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한 장면. 사진=파크컴퍼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한 장면. 사진=파크컴퍼니



“자, 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만큼이나 대중에게 익숙한 이 대사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것으로, 극 중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등장하는 대중가요의 후크 같다.

이 연극을 보는 것을 오래 미뤄왔다. 두 부랑자와 함께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릴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그 기다림이 몹시 지루할 것 같아서였다. 심지어 우리는 그 고도라는 양반이 끝끝내 오지 않는다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0년도 더 된 1953년에 초연된 ‘골동품’이라는 점도 관람을 미루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작품이 나의 관극 리스트에 오래도록 오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부조리극의 대표작으로 꼽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삶의 허무와 시공간의 모호함도 그렇지만 배우들이 암기하는 데 매우 애를 먹었을 법한 길고 난해한 대사를 견디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랜만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티켓을 손에 쥔 것은 오로지 신구와 박근형이라는 거장들의 연기를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 대한 소개를 조금 더 하기로 한다. 작품명은 줄여서 ‘고도’로 표기하겠다.

‘고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사뮈엘 베케트의 대표작이다. 연극사로 보면 부조리극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됐고, 사뮈엘은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양반은 작품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도 상당히 ‘부조리’하다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노벨상 시상식에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언론 인터뷰를 모조리 거부한 채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다는 점이 그렇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한 장면. 사진=파크컴퍼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한 장면. 사진=파크컴퍼니



‘고도’를 처음으로 무대에 올리려 했던(결국 극장을 확보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젊은 연출가 미셸 폴락에게 사뮈엘은 꽤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 또한 범상한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고도’에 관한 내 생각을 묻지만 저는 이 연극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난 보러 가지도 않을 겁니다. 그게 더 낫겠지요…. 저는 더 이상 그 세계에 있지 않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잘 해내실 겁니다. 저 없이도. 저는 이미 그들과의 이별을 마쳤습니다.”

부조리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실존주의 철학과 전위예술이 결합한 형태의 연극 사조로 알려져 있다. ‘부조리극’이란 용어는 사뮈엘이 만든 것이 아니라 헝가리 출신인 영국 평론가 마틴 에슬린이 당시 연극들의 공통점을 분석해 ‘Theatre of the Absurd(부조리극)’란 명칭을 부여하면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조리극의 또 다른 대표작이라고 하면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가 있다.

그렇다면 ‘고도’에 나타나는 부조리극의 특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1막과 2막이 거의 같은 구조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무대 한쪽에 있는 대단히 고독해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사실상 무대장치의 전부다. 그리고 한눈에도 부랑자, 노숙자로 보이는(사실 둘 다 해당) 에스트라공(고고·신구 분)과 블라디미르(디디·박근형 분) 두 남자가 등장해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주절주절 대사를 주고받는다. 이 와중에 뜬금없이 포조(김학철 분)라는 이름의 괴팍한 부자와 그의 하인 럭키(조달환 분)가 나와 상당히 ‘부조리한’ 장면을 연출하고는 퇴장한다.

대략 이것이 1막의 구조인데, 2막 역시 이 구조를 ‘복붙’하듯 반복한다. 다만 2막의 포조는 눈이 보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사뮈엘은 2막 후반에 재등장하는 두 인물에 대해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 등장시키지 않았나 생각할 뿐”이라고 했다.

삶의 무의미함과 허무함의 강조도 부조리극의 특징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나무에) 목이나 매자”는 디디의 대사가 이 특징을 잘 드러내는데, 심지어 몇 번이나 반복된다.

‘고도’는 아직도 명확한 답이 없는, 해석과 논쟁의 마트 같은 작품이다. 그야말로 온갖 다양한 해석이 “내가 맞소” 하고 난장을 벌이는 중이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역시 ‘도대체 그놈의 고도가 누구냐’일 것이다. 가장 유명한 해석은 고도(Godot)의 이름으로 인해 ‘신(God)’의 상징 또는 의인화라는 추측이다. 이 해석에 대해 저자는 “이 이름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다”며 “무의식적으로 썼을 가능성은 있지만 의식적으로 쓴 것은 아니다”고 딱 선을 그었다.

좀 더 실존주의적인 해석도 있다. 이 작품을 인간 존재의 허무와 불확실성에 대한 은유로 읽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목적 없이 태어나 의미 없는 기다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메시지라는 얘기. 나치 치하를 경험한 유럽 사회의 절망감을 반영했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권위에 대한 무비판적 복종에 대한 풍자라는 정치·사회적 시선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의미 없음 자체가 핵심 메시지’라는 주장도 있다.

신구, 박근형의 ‘고도’를 보며 꽤 행복했다. 이 무의미하고 허무한 연극을 두 배우는 활어처럼 펄펄 살아 뛰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내 생애에 이런 ‘고도’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두려울 정도다. 두 배우가 연기하는 ‘고도’라면 나도 힘껏 기다려 볼 마음이 있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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