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잔인한 아름다움 앞에 흔들리는 나는 누구인가

입력 2025. 05. 13   15:59
업데이트 2025. 05. 13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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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오스카 와일드 소설 원작 창작 뮤지컬 

영원한 젊음 얻으며 타락하는 주인공
긴장·쾌락·슬픔 정교하게 엮은 음악들
이야기 풍성하게 채우는 조연도 매력적
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도리안 그레이’ 공연 모습.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도리안 그레이’ 공연 모습.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안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었던 나, 헨리 워튼은 세상이 보는 나, 배질 홀워드는 실제의 나”라고 말했다. 어찌 오스카 와일드뿐일까.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얼굴을 갖고 인생을 살아간다. 욕망 앞에서 서성이는 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웃는 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나.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이런 얼굴들을 조용히 꺼내 놓고, 물끄러미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도리안 그레이’는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2016년 초연 당시 김준수가 연기한 도리안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가 무대 위에서 뿜어냈던, 마치 지상에 속하지 않은 듯한 고아한 아름다움,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쉽게 잊힐 만한 것이 아니다.

무슨 사연인지 9년 만에야 돌아온 이번 재연에서는 유현석, 윤소호, 재윤, 문유강이 번갈아 도리안을 맡고 있다. 신비감을 살짝 걷어내 한결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도리안이다. 초연과 재연은 같은 이야기지만, 서로 다른 계절 같아 재미있다. 초연이 서늘한 겨울 안개 속이었다면, 이번 재연은 흐린 봄 햇살 아래를 걷는 기분이다. 초연의 신비로움이 그립기도 하지만 새로운 해석에도 마음이 활짝 열렸다.

런던의 촉망받는 화가 배질은 미모의 귀족 청년 도리안의 초상화를 완성하고, 지적이며 냉소적인 헨리는 자신의 ‘실험’을 위해 도리안에게 쾌락주의의 속삭임을 불어넣는다. 도리안은 결국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초상화와 맞바꾸며 타락의 길로 접어든다. 세월과 죄의 흔적은 그의 얼굴이 아닌 초상화에 새겨진다. 도리안, 헨리, 배질의 관계는 어린 시절 본 미국 만화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헨리와 배질은 천사와 악마처럼 도리안의 어깨 위에서 싸운다. 쾌락과 탐닉을 부추기는 헨리와 예술과 도덕을 호소하는 배질 사이에서 도리안은 무너져 간다.

무대는 LED 패널과 거대한 액자를 이용해 공간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초상화 속 도리안의 얼굴은 초연 때와 달리 추상화처럼 불분명하게 묘사돼 있다. 도리안의 타락과 악을 대신 받아들이며 서서히 일그러져가는 장면에서는 조명이 핏빛으로 물든다. 도리안의 붕괴를 예감하면서도 관객은 눈을 뗄 수 없다. 무대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 도리안의 내면 풍경이 된다.


도리안 그레이 역의 배우 유현석, 윤소호, 재윤, 문유강(왼쪽부터).
도리안 그레이 역의 배우 유현석, 윤소호, 재윤, 문유강(왼쪽부터).



음악은 극의 긴장과 쾌락, 슬픔을 정교하게 엮어냈다. ‘라이프 오브 조이(Life of Joy)’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도리안, 헨리, 배질 세 인물의 신념이 한데 부딪히며 관객의 심장을 두드린다. ‘넌 누구’에서는 도리안이 수많은 자아와 마주하며 고통스러워하는데, 앙상블 배우들의 역동적인 안무는 그의 혼란과 방황을 극한까지 부추긴다.

‘꿈을 꾸던 어린 소녀’는 시빌 베인과 도리안의 뒤에 펼쳐질 몰락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 마지막 넘버 ‘도리안 그레이’에서는 초상화의 붉은빛이 극의 비극을 완성하며 객석의 숨을 멎게 한다.

도리안 배우들은 각자의 색깔을 동원해 재연의 도리안을 그려냈다. 유현석은 예술가 같은 섬세함과 청량함, 윤소호는 전율이 이는 비극성을 앞세운 도리안이다. 재윤은 순수에서 욕망으로 물드는 과정, 문유강은 묵직한 카리스마가 돋보였다. 헨리 역의 최재웅, 김재범, 김경수는 냉소, 유혹, 탐구자의 얼굴을 입히며 극의 깊이를 더했다. 배질 역의 손유동, 김지철, 김준영은 상처받은 예술가의 고뇌와 인간적 슬픔을 섬세히 표현했다.

조연 배우들 역시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웠다. 샬롯 베인 역의 이은정은 복수심과 혼란을 잘 풀어냈고, 앨런 캠벨, 브랜든 부인 같은 캐릭터들은 극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해일리가 연기한 시빌 베인의 비중은 다소 아쉽다. 도리안의 연인이자 그의 마지막 순수를 상징하는 인물인 시빌은 뛰어난 연기력과 외모를 지닌 홀본 로열극단의 셰익스피어 전속배우로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어쩐 일인지 어지간한 조연보다 분량이 적은 느낌이라 존재감이 약화됐다. 시빌의 서사가 좀 더 그려졌다면 도리안의 몰락이 더욱 비극적이고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런던 사교계의 상류층 미망인인 브랜든 부인 역의 이영미는 과연 명불허전. 한국 뮤지컬계에서 가장 강렬한 음색을 가진 여배우 중 한 명으로, 중년이 된 지금도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관객의 혈관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사교계 상류층 부인답게 화려한 의상을 여러 차례 갈아입으면서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든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한 청년의 타락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욕망, 아름다움, 도덕, 죄의식이라는 보편적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 안의 진짜 얼굴은 무엇인가?” 다만 이 작품의 강력한 재미는 관객이 답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질문을 굿즈처럼 가슴에 품은 채 극장을 나서게 될 뿐이다.

인간을 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자 힘이기에, 우리는 언젠가 잃어버릴 걸 알면서도 아름다움을 좇는다.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아름다울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일지 모르지만.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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