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리 속에 훅 들어온 ‘날리’ 법석

입력 2025. 05. 12   15:59
업데이트 2025. 05. 1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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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스타를 만나다 - 하이퍼한 K팝 ‘캣츠아이’

낯선 듯 친근한 하이퍼팝 ‘날리’
날카로운 기계음·왜곡된 보컬
빠르게 전환되는 영상의 폭격
K팝 특유 마케팅·퍼포먼스 더해 
가장 높은 장르 이해도 자랑
‘자아’ 보이지 않는 건 아쉬워

 

6인조 걸그룹 캣츠아이. 사진=하이브 레이블즈
6인조 걸그룹 캣츠아이. 사진=하이브 레이블즈

 


손으로 가려진 얼굴 가운데 내놓아진 입이 거친 목소리로 호기롭게 선언한다. 

“모든 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

과격한 음악이 기꺼이 호응한다. 귀를 찢을 듯 파괴적이고 날카로운 기계음, 왜곡된 보컬과 과장된 표현이 2분17초의 짧은 시간을 빼곡하게 채운다. 불분명한 곡 구조, 극도로 단순화된 코드 진행으로 구호를 외치는 청각 폭격이다.

뮤직비디오는 시각적 폭력이다. 인스턴트 클럽샌드위치를 만드는 주방부터 화려한 콘서트, 거대한 리무진 파티 차량과 대저택을 빠르게 전환하는 영상은 최고와 최악의 평가를 뜀뛰기하며 반복 시청을 유도한다. 손이 녹아내리고, 빌딩에서 추락한다.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레드카펫 위 슈퍼스타들을 바삐 촬영하는 기자들의 눈이 기괴하게 튀어나온다.

무대는 자극의 고삐를 당긴다. 기상천외한 동작과 천진한 표정, 한 치의 오차 없는 군무가 전 세계 수천만의 개인 기기 화면에서 펼쳐진다. 거듭 자극에 둔감해진다. 그들의 말이 맞다. 단어 하나만으로 온 세상을 다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하이브 소속 미국 현지화 6인조 걸그룹 캣츠아이(Katseye)가 4월 30일 발표한 신곡 ‘날리(Gnarly)’다. ‘날리’는 1970년대 미국에서 파도타기를 즐기던 젊은이들이 위험한 기술을 선보이며 툭툭 내뱉던 말이 굳어진 속어다.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쩐다’에 가깝다. 힘들고 낯선 무언가를 묘사하던 단어가 그 기이함으로 인해 대단하고 멋지다는 뜻까지 갖게 됐다는 점, 긍정과 부정의 양극단을 오가며 사용할 수 있다는 데서 비슷하다.

캣츠아이가 주목한 특징은 휘발성이다. 곡을 시작하며 그들이 ‘날리’라고 나열하는 것들을 보자. 버블티, 테슬라, 프라이드치킨, 할리우드 파티. 대중문화에서 반복 등장하는 이 단어에 일련의 공통점 따위는 없다. 전 세계적으로 테슬라 타도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과 할리우드 파티의 비화는 몰라도 된다. 대충 ‘쩐다’고 넘겨 버리자. 깊이 생각하고 뱉는 말이 아니다. 쓱 훑어보고, 다 담기도 전에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감탄사다. 진짜 ‘날리’한 건 이 노래뿐이다.

장난스러운 말장난과 허세 섞인 표현을 힘찬 보컬과 랩, 무대 위 독한 퍼포먼스로 선보이며 유행의 최첨단을 선도하는 캣츠아이만을 기억에 새기고자 하는 목적이 선명하다.

지난해 정규앨범 한 장으로 전 세계 대중문화를 휩쓴 가수 찰리 XCX가 떠오른다. 그는 연두색 배경의 앨범 커버에 무성의해 보이는 글자체로 써 넣은 ‘브랫(brat)’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세웠다. 2010년대 언더그라운드 클럽과 레이브 파티를 즐겼던 음악 팬들, 아이코나 팝·숀 멘데스·이기 아잘레아 등 시대를 풍미했던 메이저 팝스타부터 21세기 인터넷문화를 몸에 익힌 우리가 모두 찰리 XCX의 ‘브랫’에 공감했다.

누구나 ‘브랫’이 될 수 있었다. 디지털 풍화로 낡아 버린 연둣빛 이미지는 곧 그 자체로 밈이 됐다. 2000년대 향수로 촉발된 Y2K 리바이벌, 인터넷 유명인과 창작가가 총집결했다. 그들이 전개한 캠페인이 ‘브랫 서머(brat summer)’였다. 지난 미국 대통령선거 민주당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이가 ‘브랫’을 외쳤다.

그런 ‘브랫’의 근간에 ‘하이퍼팝’이라는 음악이 있다. K팝 팬들에게는 ‘쇠맛’ 에스파의 대표곡 중 하나인 ‘새비지(Savage)’를 필두로 있지,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등 그룹이 시도해 알려져 있다. 2010년대 가장 유행하는 팝의 공식을 과장하고 비틀어 버린 이 음악 형식의 기틀을 잡은 음악가가 찰리 XCX다. 그는 인터넷문화와 비주류문화의 독특한 시선으로 신선한 흐름을 만들어 온 음악가의 대표주자였다.

엄숙하고 쿨했던 음악계는 온갖 다양한 취향과 센스가 공존하는 하위문화의 등장에 잠깐 당황했지만, 새로운 스타일이 인기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하이퍼팝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 음악장르로 규정해 버렸다. 하이퍼팝은 곧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전만큼 새로움과 저항의 정서는 옅어졌다. 이를 누구보다 깊이 체감하고 있던 찰리 XCX가 만든 앨범이 바로 ‘브랫’이었다. ‘브랫 서머’는 하이퍼팝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사육제(謝肉祭)였다.

‘날리’로 돌아가 보자. 굉장히 낯설게 다가오는 이 곡이 사실 지난 10여 년간 대중음악의 주목할 만한 움직임으로부터 등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전에 없던 친근감이 느껴진다. 곡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중국 출신 음악가 앨리스 롱위 가오는 2020년대 하이퍼팝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가수다. 그는 오래전부터 SNS로 공유하고 있던 곡의 아이디어를 가장 거대한 K팝 기획사의 글로벌 그룹에 제공했다. 모호한 단어로 세상 이치를 단순화하는 방법은 ‘브랫’의 연장선이다. 자주적이고 강한 자아로 귀결되는 결론 역시 하이퍼팝 시대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의 특징을 따라간다. K팝이 시도한 하이퍼팝 가운데 가장 높은 장르 이해도를 가진 곡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 해외 팝시장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육성 과정과 자극의 정수만을 압축해 눌러 담는 K팝 특유의 마케팅·퍼포먼스가 더해져 다른 무엇도 아닌 ‘날리’가 완성됐다.

멤버들의 뛰어난 무대 실력과 고자극의 음악으로 ‘날리’는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으며 K팝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왜 어딘가 모르게 허전한 걸까? 찰리 XCX는 ‘브랫’을 “나, 나의 결점, 나의 실수, 나의 자아가 모두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고 고백했다. K팝의 야심 찬 프로젝트 ‘날리’에는 결점과 실수가 없다. 하늘하늘했던 전작 ‘터치(Touch)’에 이어 공격적인 하이퍼팝을 가져온 전략을 생각하면 자아도 없다. 콜린스 영어사전은 지난해 ‘브랫’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며 ‘자신감 있고 독립적이며 쾌락주의적인 태도’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날리’는 옥스퍼드사전이 지난해 뽑은 올해의 단어가 어울린다. ‘사소하거나 도전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온라인 콘텐츠 등의 과도한 소비로 인해 사람의 정신적 또는 지적 상태가 악화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태’인 ‘브레인롯(Brainrot)’이다.

 

필자 김도헌은 대중음악평론가다. 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이다. 음악채널 제너레이트(ZENERATE)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다.
필자 김도헌은 대중음악평론가다. 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이다. 음악채널 제너레이트(ZENERATE)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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