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그들의 마음 모여 제주를 일으켰다

입력 2025. 04. 29   17:09
업데이트 2025. 04. 2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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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전국 독립운동기념관 탐방 ② 제주 항일기념관

거센 풍파 맞선 어민 파도 뚫고 일어선 해녀
독립의 불씨 전하는 어머니
수탈의 시작 해산물·토지 빼앗고 노동력 착취
침탈의 상흔 역사 유산·시설 훼손 민족의 혼 말살 시도
저항의 정신 척박한 현실에도 바닷가·절·학교 모두 항일의 현장이었다

제주 항일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제주도민들의 항일운동 역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제주인들의 투혼과 함께 역사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광복 80주년 기념 연중기획 전국 독립운동기념관 탐방 두 번째 순서로 제주특별자치도 조천읍의 제주 항일기념관을 소개한다.  글=임채무/사진=조용학 기자

 

제주 항일기념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5인의 군상 조형물'.
제주 항일기념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5인의 군상 조형물'.


제주 항일기념관에 들어서면 이 섬이 치열한 항일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임을 실감하게 된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5인의 군상 조형물’은 제주 지형을 8각형 기단으로 형상화하고, 그 위에 거센 파도와 맞서 싸우는 제주도민들을 표현했다. 파도는 일제의 침략이자 억압을, 파도를 뚫고 일어선 인물들은 제주도민의 저항정신을 상징한다. 특히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은 후손에게 독립의 불씨를 전하겠다는 염원을 담고 있다.

“제주 항일운동은 교과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지만 섬 전체가 항일의 현장이었습니다.” 김현희 문화해설사는 기념관 곳곳에 일제의 수탈과 군사기지화에 맞선 제주도민의 고난과 저항이 촘촘히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근대 한국사의 주요 사건과 제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흐름을 나란히 정리한 ‘항일운동사 연표’는 제주가 독립운동의 변두리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제주 세화에 조성된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제주 세화에 조성된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아픔의 기억 

1층 전시실에서는 일제강점기 제주 지역에서 벌어진 항일운동의 시작과 전개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일제의 수탈은 잠수기선이 등장하면서 본격화했다. 일제는 잠수기선과 머구리(잠수부)를 동원해 제주 연안 해산물을 대규모로 수탈했고, 도민들은 생계의 위협을 받았다. 김 해설사는 “(무분별한 남획으로) 30㎝에 달하던 전복 크기가 10년 만에 20㎝로 줄었을 정도로 수탈은 무자비하게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명분으로 제주인의 땅을 빼앗기도 했다. 가난에 내몰린 도민들은 부산 영도 등지로 떠나거나 일본으로 건너가 저임금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제주 유일의 생존 애국지사인 강태선 옹도 이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초를 겪었다. 김 해설사는 “당시 제주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5만 명이 일본으로 갔다”며 “지금도 제주에는 일본에 친인척을 둔 가정이 많다”고 소개했다.

 

 

원래의 관덕정과 일제에 의해 일본식으로 개조된 모습(사진 위). 일제의 제주 수탈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김현희 문화해설사.
원래의 관덕정과 일제에 의해 일본식으로 개조된 모습(사진 위). 일제의 제주 수탈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김현희 문화해설사.


아직도 남은 상처 

우리나라에 두 곳밖에 남지 않은 역사적 유산인 ‘관덕정(觀德亭)’도 일제의 흉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관덕정은 조선시대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상무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만든 시설로 일제는 1924년 당시 제주 중심시설이었던 관덕정을 일본식으로 개조했다. 이는 조천만세운동(1919) 등 제주 항일운동의 주무대인 ‘관덕정’을 훼손함으로써 제주도민의 항일정신을 말살하려는 시도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제주를 군사기지로 삼았다. ‘알뜨르 비행장’이 그 증거다. 1933년 약 6만 평이던 비행장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80만 평 규모로 확장됐다. 이는 제주가 중국과 일본의 중간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관광명소지만 제주 오름에 있는 수많은 동굴은 일제가 전쟁을 대비해 만든 진지들”이라며 “많은 제주도민이 동원돼 고초를 겪었다”고 김 해설사는 부연했다.

 

법정사 항일운동을 묘사한 디오라마(사진 위)와 조천 3·1만세운동 판결문.
법정사 항일운동을 묘사한 디오라마(사진 위)와 조천 3·1만세운동 판결문.


계승되는 항일운동


2층 전시실은 제주 3대 항일운동인 해녀항일운동,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해녀항일운동은 일제 착취에 맞서 일어난 항일운동이다. 1931년 12월 해녀들은 관제조합 반대, 수확물 가격 재평가 등의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결정하고 대표자 3인과 대표위원 10명을 선출했다. 이어 다음 해 1월 12일 세화리 장날을 기해 본격화된 시위는 같은 달 27일 종달리 해녀들을 일제가 탄압하면서 끝을 맺었다. 연인원 1만7000여 명이 참가한 이 운동은 일제강점기 유일한 여성 주도 항일운동이자 전국 최대 어민운동, 1930년대에 일어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꼽힌다.

1918년 일어난 법정사항일운동은 김연일 스님과 의형제 강창규, 방동화 그리고 선도교 제주대표 격인 박주성이 제주도민 700여 명과 벌인 무력투쟁이었다. 당시 이들은 일제 중문주재소를 습격해 주재소장을 포박하고 항거의 뜻을 알렸다. 3·1운동 이전 일제에 항거한 단일 투쟁으로는 최대 규모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일제는 3·1운동에 많은 학생이 동참하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을 귀향 조치했다. 이에 휘문고를 다니던 제주 출신 김장환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들고 귀향, 당숙인 김시범·김시은에게 보여주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했다. 김시범은 의병 활동을 하던 최익현의 제자 김희정의 문하생이었다. 이어 김용찬·고재륜·김형배·황진식·김경희·김필원·김희수·이문천·박두규·김년배·백응선을 규합해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제주 조천에서 네 차례 만세운동을 펼친다. 바로 조천만세운동이다.

김 해설사는 “제주에서도 많은 항일운동이 일어났다”며 “2층 전시실에는 제주 출신이거나 제주에서 활동한 항일유공 서훈자 명단을 전시해 그 얼을 기리고 있다”고 말했다.

 

기념관 야외에 설치된 애국선열추모탑(왼쪽)과 3·1독립운동기념탑.
기념관 야외에 설치된 애국선열추모탑(왼쪽)과 3·1독립운동기념탑.


다양한 야외 공간 


기념관 밖으로 나오면 애국선열 추모탑과 3·1독립운동 기념탑이 기다린다. 애국선열 추모탑은 높이 12m의 거대한 화강암 기둥 위에 불꽃 형상을 얹어 기단부에 새겨진 3000여 명의 이름과 함께 숭고한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3·1독립운동 기념탑은 세 갈래의 기둥이 서로 엮인 구조로 독립만세 함성을 형상화했으며, 중앙에는 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부조(浮彫)가 새겨져 1919년 제주도민의 항일 의지를 생생히 전한다. 기념관이 단순히 제주 독립운동의 역사를 전시한 것이 아니라 선열들의 독립의지와 희생을 기리는 성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조형물이다.

김 해설사는 “기념관은 제주의 독립운동 역사를 망라하고 있다”며 “특히 애국선열 추모탑과 3·1독립운동 기념탑은 독립정신을 기억하고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는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고 역설했다.

기념관 야외 한 곳에는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아이들과 뛰어놀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태극기 바람개비를 설치한 공간은 포토존으로도 인기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제주 항일기념관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제주도민의 불굴의 의지와 희생정신을 전하고 있었다. 척박한 섬에서 피어난 항일운동의 불꽃은 오늘날 우리에게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관람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료는 무료. 관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프로그램(한국어)을 제공한다. 주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신북로 303(064-783-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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