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가짜 인터폴 요원을 사랑한 스파이
러 위해 활동한 불가리아 여성 2명
잡고 보니 같은 남자와 연인관계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포섭의 예
중요 직책 여성보다 순진한 여성 타깃
감정 지배하며 첩보 활동 도구로…
불가리아인 러시아 스파이 조직 적발
지난해 11월 28일 영국 검찰은 러시아를 위해 정보활동을 한 불가리아 남녀 5명을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올린 루세프, 비저 잠바조프, 티호미르 이반체프 등 남성 3명과 바냐 가베로바, 카트린 이바노바 등 여성 2명은 2020년부터 2023년까지 4년간 유럽 곳곳에서 러시아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감시하고 납치를 모의하는 등 스파이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를 비판해 온 탐사보도 매체 벨링캣의 크리스토 그로제프 기자도 중요 감시 대상이었다. 그로제프는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이 2018년 런던에서 암살될 뻔한 사건 배후에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 정보기관의 타깃이 됐다.
이들 5명은 그로제프를 2021년부터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에서 따라다니며 미행하는 등 밀착 감시해 왔고, 러시아로 납치하거나 살해할 계획까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러시아 전문 매체 인사이더의 반러시아 성향 기자인 로만 도브로호토프와 카자흐스탄 정치인 출신으로 반러시아 인사인 베르게이 리스칼리예브도 감시하며 동향을 수집해 왔다. 밀착 감시를 위해 여성 2명이 미인계를 쓸 계획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관여한 첩보 작전 6건 중에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훈련받고 있던 독일 내 미군기지 동향과 관련 인사에 대한 첩보 활동이 포함돼 있었다. 단순 감시와 동향 파악뿐 아니라 현장 주변의 휴대전화 통신을 마비시키기 위한 특수장비도 준비했다고 한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이들 조직은 2014년 러시아 정보기관에 포섭됐다. 지금은 러시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국적의 얀 마르살렉이 러시아 정보기관의 지시사항을 영국 내 리더인 루세프에게 전달하면, 그가 조직원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하는 체계를 갖췄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잠바조프는 두 명의 여성과 모두 연인관계를 유지하면서 감정적 지배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체포될 당시 루세프의 거주지에서는 9개국 위조여권, 휴대전화 221대, 심카드 495개, 드론 11대, 휴대전화 도청장비 등 스파이 활동을 위한 대량의 물품이 발견됐다. 이들을 적발한 런던 경시청은 “산업적 규모로 이뤄진 대규모 스파이 조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인터폴 위해 일했는데 러시아 스파이?
영국 런던에서 ‘프리티 우먼’이라는 뷰티숍을 운영하던 30세의 평범한 불가리아 여성 바냐 가베로바는 2023년 2월 어느 날 새벽 연인과 침대에서 달콤한 꿈에 빠져 있다가 문을 부수고 급습한 경찰에 체포됐다. 어렸을 때부터 경찰관이 되는 게 꿈이었던 그녀는 우연히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소속의 러시아 경찰관이라는 잠바조프를 만나게 됐다. 그가 출장에 동행해 경험을 쌓게 해주겠다고 하자 그를 도와 유럽 각국을 다니며 대상자 미행 감시에 참여했다.
이후 잠바조프가 뇌종양에 걸렸다면서 자신을 대신해 활동해 달라고 요청하자 지시에 따라 임무 수행을 계속했지만, 여전히 인터폴 수사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감시 대상은 반러시아 성향의 언론인 등 러시아가 평상시 동향을 파악하고 유사시에는 납치, 암살까지 고려한 중요 인물들이었다. 가베로바는 재판에서 인터폴 수사관인 남자친구를 도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며 자신이 러시아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3월 7일 런던 중앙형사법원의 배심원들은 가베로바 등 불가리아인 3명을 유죄로 평결했다. 그녀의 연인이던 잠바조프 등 2명은 이미 러시아를 위한 스파이 활동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상태였다. 스파이 활동인 것을 몰랐다는 그녀의 주장은 체포됐을 때 처벌을 피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스토리에 불과하며, 가담 수준을 고려할 때 러시아의 스파이 활동임을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는 검사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스파이들이 여성에게 접근해 연인관계로 발전시킨 후 지속적인 스파이 활동에 이용하는 것은 전형적인 수법 중 하나다. 과거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가 서독 내 주요 인사 여비서들을 포섭해 중요 정보를 빼내는 데 활용해 잘 알려진 소위 ‘로미오 공작’이 대표적이다.
스파이 포섭의 수단으로 흔히 돈(Money), 이념(Ideology), 협박(Coercion), 자존감(Ego) 등 네 가지를 들어 M.I.C.E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취약점은 훨씬 다양하다. 최근에도 각국에서 로맨스 스캠(연애 감정을 이용한 사기)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남녀 간 사랑이 중요한 취약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번 스파이 사건에서는 냉전기 독일에서처럼 중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직책의 여성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순진한 여성을 연애 감정에 빠지게 한 후 감정적 지배력을 활용해 도구로 활용한 것이 다를 뿐이다. 물론 5월로 예정된 판결에서 어떤 주장이 채택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평범한 ‘대리요원’ 활용하는 러시아 스파이
지난달 24일에는 오스트리아 국가보안정보국(DSN)이 불가리아 국적 여성을 활용한 러시아의 허위정보유포공작(disinformation)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정보기관이 빈에 사는 평범한 불가리아 국적의 여성 청소부 츠베탄카를 활용해 거리에 선전용 스티커를 붙이고 SNS에서 러시아를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토록 한 것이다. 다양한 감시 임무도 수행했다. 런던 조직이 감시했던 반러시아 기자 그로제프와 DSN 책임자인 오마르 피르히너, 탐사보도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주간지 ‘프로파일’의 편집장 안나 탈함머 등이 대상자였다.
츠베탄카는 그로제프 감시를 위해 그의 집 맞은편에 아파트를 얻기도 했고, 탈함머의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훔쳐 모스크바로 보내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를 포섭한 사람이 런던 조직의 가베로바에게 인터폴 요원이라며 접근한 잠바조프였으며, 그녀에게도 똑같이 인터폴 요원을 사칭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스크바의 상부선도 런던 조직을 조종하던 마르살렉으로 밝혀져 러시아가 그를 정점으로 하는 유사한 스파이 세포조직을 유럽 곳곳에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DSN은 공식 성명에서 “왜곡된 가짜 뉴스 유포는 사회 통합을 위협하는 요소”라며 강력한 대응 의지를 밝혔다. 외르크 라이히트프리트 국무장관도 “세계적 안보상황을 고려할 때 정보기관 역량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정보기관은 전통적으로 스파이들을 외교관 신분 외에 제3국인 신분을 취득하게 한 후 목표 국가로 이주시켜 장기 암약하도록 하는 ‘일리걸(Illegal)’ 활용을 중시해 왔다. 하지만 최근 제3국인을 포섭해 ‘대리요원’으로 활용하는 수법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시작된 2022년 이후 공격적인 스파이 활동으로 각국에서 러시아 외교관 추방 및 러시아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범죄 조직과 결탁해 납치와 암살을 대행하도록 하거나 평범한 사람을 단순한 활동의 도구로 활용해 노출될 경우 자신들과의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을 도구로 활용하는 정보기관의 휴민트(HUMINT) 공작 수법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며, 오늘도 각국 스파이들은 더 교묘한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이를 찾아내고 무력화하는 방첩에도 무한한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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