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그은 메스질…惡소리 나는 광기 보여주다

입력 2025. 04. 09   17:11
업데이트 2025. 04. 0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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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페르소나 - 박은빈, 선한 이미지 버려도 매력적인 배우 

아역으로 데뷔…새로운 가면 즐기며 써 온 경력 28년 베테랑 연기자
다혈질·자폐 변호사 다양한 역할 거쳤지만 밑바탕엔 늘 ‘착함’ 있어
‘하이퍼나이프’서 기괴한 웃음·독기 넘치는 사이코패스로 연기 변신
차근히 쌓아온 이미지 버려도 존재감 더 빛나는 박은빈의 힘 보여줘



“배우로서 새로운 인물을 만나 삶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작업이다.” 미국 유력 매체 포브스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박은빈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디즈니+ 시리즈 ‘하이퍼나이프’의 정세옥이란 사이코패스 천재 의사로 돌아온 박은빈의 소회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실로 박은빈이라는 배우의 끝없는 연기 갈증과 도전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겨우 32세이지만, 1997년 아역으로 데뷔해 연기 경력만 28년에 달하는 이 배우는 새로운 역할의 가면을 쓰는 일을 즐기듯 해 온 전적이 있다.

‘청춘시대’에서 끝없이 야한 농담을 던지는 송지원이란 인물을 연기하며 아역 이미지를 뚝 떼 버리더니 ‘스토브리그’에서는 다혈질의 오피스우먼 이세영으로 분해 단단한 성인 배우로서 자신을 세워 놓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선 다혈질 이세영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여리고 순한 채송아로 로맨스와 성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더니 ‘연모’ 같은 사극에서는 남장 여자로 왕 역할에 도전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관심과 반향을 일으킨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천재 변호사를 연기했고, ‘무인도의 디바’에선 실제 앨범을 낼 정도의 디바가 돼 감동적인 노래를 들려줬다.

매번 새 얼굴을 갈아 끼우는 것을 마치 배우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이는 박은빈이지만,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여겨질 즈음 작품 ‘하이퍼나이프’에서 또다시 놀라운 변신을 보여 준다. 지금껏 여러 얼굴에 도전했지만 모두 박은빈 특유의 선한 이미지가 밑그림으로 존재했던 것과 달리 ‘하이퍼나이프’의 정세옥은 이런 밑그림조차 지워 버릴 정도로 파격적인 캐릭터다.

정세옥은 17세의 나이에 의대에 수석 입학할 정도로 천재적인 뇌수술 전문 신경외과 전문의다. 그녀가 메스를 들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수술도 척척 해내지만, 이 인물은 오로지 뇌수술에만 집착하며 수술을 방해하는 자라면 별 고민 없이 살인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다. 그래서 그녀가 들고 있는 메스는 양면적 성격을 띤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의 메스이면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의 메스다. 이 파격적인 캐릭터는 선한 이미지 자체가 없는 악역이고, 작품 또한 악당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피카레스크’다. 그러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배우도 아니고, 늘 선한 이미지로 대중 앞에 서던 박은빈이 사이코패스 의사 역할로 피칠갑을 하고 나온다니 왜 관심이 가지 않겠는가.

뇌수술 전문의가 등장하니 의학드라마 같은 요소가 있지만 ‘하이퍼나이프’는 그보다 사제 간의 질깃질깃한 관계에 집중하는 드라마다. 정세옥의 맞은편에 서 있는 스승 최덕희(설경구) 교수가 그 상대다. 최 교수는 이 천재적 재능을 지닌 정세옥을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제자로 아끼며 키우지만, 지나치게 수술에 집착하는 그녀에게서 의사면허를 박탈하고 만다. 수술 없인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정세옥은 병원 바깥에서도 수술이 필요하나 수술할 수 없는 이들을 불법 수술해 주는 섀도닥터로 살아간다. 한때는 존경하고 따랐던 최 교수를 향한 정세옥의 증오와 분노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최 교수가 나타난다. 자신의 뇌에 자라고 있는 종양수술을 해 달라는 것. 정세옥은 거부하지만 최 교수는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그녀가 처한 위험한 상황도 제거해 주면서 수술을 종용한다. 그 과정에서 최 교수 또한 정세옥과 마찬가지로 사이코패스 의사였다는 게 드러난다.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최 교수와 정세옥 사이의 애증 어린 단단한 끈이 돼 이들은 치열하게 대립하고 맞붙으면서도 사제 간의 끈끈한 관계 또한 보여 준다.

 

 



박은빈은 이 정세옥이라는 색다른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눈빛부터 갈아 끼웠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엉뚱하고 귀여운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면 ‘하이퍼나이프’의 독기가 철철 흐르는 정세옥의 눈빛은 과연 같은 배우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강렬하다.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성범죄자를 유혹해 낯선 곳으로 데려가 메스로 목을 긋고 피가 묻은 얼굴로 기괴하게 웃는 모습은 소름 끼치는 사이코패스 면모를 드러낸다. 박은빈은 어쩐지 그 장면을 연기하며 오히려 설레고 통쾌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껏 걸어 왔던 필모로도 알 수 있듯이 박은빈은 새로운 인물을 연기할 때 많은 흥미를 느끼는 배우여서다. 그 순간 박은빈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던 선한 이미지는 메스의 칼질과 더불어 찢겨 날아가 버렸다.

정세옥이란 인물은 이런 잔혹한 면만 있는 게 아니다. 스승 최 교수와는 유사 연인관계라고 할 정도로 애증이 묻어난다. 같이 수술할 때는 마치 사랑을 나누는 연인처럼 행복한 얼굴이 피어나고, 수술을 막아 세우는 최 교수 앞에선 사랑을 거부당한 연인의 아픔이 묻어난다. 자신의 뇌수술을 위해 다시 접근한 줄 알았던 최 교수가 사실은 죽음이 가까운 상태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정세옥은 마음이 더 절절해진다. 최 교수의 접근은 어쩌면 죽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정세옥과 함께 다시 수술해 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제자를 향한 스승의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세옥은 사이코패스이면서 천재 의사지만, 동시에 스승과 유사 연애관계를 보이는 제자이기도 하다.

박은빈이 정세옥으로 분하면서 선한 이미지를 가차 없이 버렸지만, 그의 연기가 여전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캐릭터가 가진 복합적 성격 때문이다.

단순한 사이코패스라면 그저 자극으로 소비되고 말겠지만, 이 복합적 인물은 피카레스크 장르를 가져와 과장되게 사제 간의 이야기를 그려 내며 자극이 아닌 감정을 건드린다. 박은빈이어서 가능한 역할이고, 가능해진 매력이다. 이미지를 깨는 것이야말로 배우로서 진가를 드러낸다는 걸 작품마다 증명했던 박은빈이기에.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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