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봄날

입력 2025. 04. 03   16:56
업데이트 2025. 04. 0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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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식 시인
이창식 시인


오솔길 걷다가 
꿈틀 봄이 밟힌 듯하여 
까치발로 눈치 살핀다 
키 작은 민들레 
노란 웃음 짓고 
쫑긋쫑긋 풀싹 만세 부른다 
발아래 딴 세상 
함부로 발 내민 일 
이렇게 미안한 날도 있다 
눈 뜨고 못 보는 것 
봄을 딛고서야 봄을 알고 
길섶에 앉아 봄이 되었다 


<시 감상>

아무리 사소한 사물이나 현상일지라도 새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일상의 저편으로 밀려나 있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세계와 문득 마주친다. 살면서 듣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 시원의 순수와 진실을 내장하고 있어 그것이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과 교감하면서 마음에 시를 불러일으킨다. 이를 시심(詩心)이 온다고 한다. 이 시의 숨은 화자 ‘나’가 “오솔길 걷다가” 문득 “꿈틀 봄이 밟힌 듯”한 감각을 느끼며 “까치발”을 세우고 주위를 살피는 모습은 시심이 발현되는 현상과 닮았다.

하지만 섬광처럼 강렬한 감흥(感興)을 일으키는 시심일지라도 그 자체로는 시가 되지 못하고, 어느 한순간 사라지고 만다. 현실의 경험에서 우러난 시심이 상상력으로 재구성돼 시의 문을 두드릴 때 화자의 “발아래 딴 세상” 같은 시의 세계가 열린다. 화자의 시심이 포착한 그 세계는 어린 생명이 자라나는 세상이다. 화자는 그 경이로운 세상에 “함부로 발 내민 일”을 깨닫고 반성한다. 그렇게 경험과 성찰로 다져지고 한껏 무르익은 생명 경외(敬畏)의 시심은 스스로 “길섶에 앉아 봄이 되었다”. 이제 화자와 ‘봄날의 세계’는 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된 시심을 이뤘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시가 탄생한다. 시의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것을 ‘동일화의 원리’라고 한다. 동일화는 특히 서정시에서 매우 유효하다. 서정 주체와 대상이 일체(一體)가 됐을 때 진솔한 감동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더하여 서정 자아인 숨은 화자를 통해 생명 사랑의 시심을 전하는 이 시의 언술은 겸손하면서도 역동적이다. 관념이나 추상의 언어를 발치하고, 구체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시어를 심으며 동일화의 서정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투박한 행간에서 운동에너지가 생동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이 또한 이 시의 진실성을 담보하며 독자의 친밀한 접근에 이바지한다. 차용국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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