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대한인국민회’ 조직화 양대 목표에 심혈

입력 2025. 04. 01   15:51
업데이트 2025. 04. 0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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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며 다시 미국으로 

러시아서 만난 이갑 뇌졸중 투병 충격
LA 도착 즉시 치료비 보태려 막노동
끝내 ‘평생 동지’ 잃은 도산 비통의 눈물
민족운동의 초석 될 지도자 양성 큰 뜻 
세계에 산재한 동포들 신분 보호 절실
하와이·캐나다·멕시코 등서 구국 활동

 

1910년대로 추정되는 이갑의 모습.
1910년대로 추정되는 이갑의 모습.

 

망명객의 고달픈 여정

북만주 일대를 둘러본 도산은 일본 경찰의 체포 위험을 피해 배편을 포기하고, 육로를 이용해 시베리아와 유럽을 거쳐 영국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도산은 먼저 러시아 동남부에 있는 치타(Chita)에 들러 국민회 원동지회 사업을 점검하고, 동지 이강(李剛)에게 신한민촌 건설을 추진하도록 부탁했다. 이강은 도산과 같은 고향의 동갑내기로,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평생 동지가 된 인물이다.

이강은 집을 떠나기 전 가족의 생활비가 걱정돼 부인에게 물으니, 도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때 준 돈이 있어 몇 달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도산이 여비 중 몇백 원을 떼어 주면서 “남편에게는 알리지 말고 식량을 사는 데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도산안창호전집 12』).


1911년 7월 정영도를 데리고 치타를 떠난 도산은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러시아 수도)에 도착해 동지 이갑(李甲)을 만나 보니 그는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돼 있었다. 도산은 미국에 도착하면 경비를 마련해 이갑을 데려다 치료하기로 약속하고, 정영도를 그의 곁에서 돌보게 하고 독일 베를린으로 떠났다. 

도산은 베를린에 머물면서 독일인의 근면과 애국심, 발달한 기술력, 합리적인 생활태도 등을 체험하고 감명을 받았다. 도산은 베를린을 출발해 8월 24일 런던에 도착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영국의 발전상을 보며 독일과는 또 다른 모습의 선진 문명을 체험했다.

도산이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배를 타고 뉴욕항에 도착한 것은 1911년 9월 2일, 다시 기차를 타고 시카고 새크라멘토의 한인 농장을 둘러보고 9월 2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10월 13일 동포들의 성대한 환영식에 참석해 연설한 후 마침내 가족이 기다리는 LA 리버사이드로 돌아왔다. 서울을 떠난 지 약 1년6개월, 집을 떠난 지 4년 만의 일이며 그의 나이 33세가 됐다. 

 

러시아 정부가 발행한 도산의 여행증명서. 도산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동할때 사용했다.
러시아 정부가 발행한 도산의 여행증명서. 도산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동할때 사용했다.

 

신의를 생명처럼 여기다

1911년 10월 LA에 돌아온 도산은 곧바로 이갑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운하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도산은 이렇게 번 돈과 부인이 빨래·삯바느질로 저축한 돈을 합한 300달러를 ‘신한민보’ 주필로 초청한다는 여행증명서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갑에게 보냈다. 돈을 받은 이갑은 도산 부부의 피땀이 서린 돈임을 알고 감동해 통곡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동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이갑의 쾌유를 빌었다.

여행 준비를 마친 이갑은 정영도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렵게 뉴욕항에 도착했으나, 중병 환자라는 이유로 입국 허가를 받지 못해 러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그 후 치타와 만주 무링현을 오가며 투병하던 이갑은 1917년 6월 13일 향년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갑은 12세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됐으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한국군 참령(소령)까지 올랐다.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장학재단을 만들어 청년들의 유학을 도왔다. 신민회를 조직할 때 도산을 만나 의기투합해 평생 동지가 된 인물이다. 그런 이갑의 타계 소식을 들은 도산은 비통한 눈물을 흘렸고, 고명딸 이정희를 수양딸로 맞아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1912년 8월 영국 런던의 왕홍성이 도산에게 보낸 편지.
1912년 8월 영국 런던의 왕홍성이 도산에게 보낸 편지.



도산이 미국에 돌아온 후 1년 가까이 지난 1912년 8월 영국 런던의 왕홍성(王鴻盛)이란 사람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의 고마운 선물과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그런 답례를 받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우 놀랍고 기쁩니다. 사소한 친절에 대해 그렇게까지 감사하니 더욱 기쁩니다.”(『도산안창호전집 2』) 대강 이런 내용이다.

도산은 1911년 여름 미국으로 오는 길에 영국에서 여비가 모자라 한 중국 식당에 들어가 돈을 빌렸고, 도착해 빌린 돈과 함께 감사를 전한 것으로 보인다. 도산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언제·어떤 상황에서도 신의를 중요시하고 동지들을 배려하는 도산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주도면밀한 도산이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병든 이갑을 만나 그를 위로하고, 정영도에게 간호를 맡기고 떠날 때 최소한의 여비만 남기고 지니고 있던 돈을 다 털어줬을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과 영국을 거치며 체류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다 보니 여비가 다 떨어져 중국 간판을 보고 들어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여비를 빌렸을 것이다. 중국인은 같은 동양인으로 사정이 딱해 보여 도와줬을 뿐, 돌려받을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임원들. 맨 뒷줄 오른쪽 첫째가 도산이다.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임원들. 맨 뒷줄 오른쪽 첫째가 도산이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취임

도산은 미국으로 오는 기나긴 여정에서 앞으로 추진해야 할 두 가지 사업을 구상했다.

첫째는 건전한 인격과 전문 능력을 갖춘 인재를 모아 민족운동의 초석이 될 지도자로 양성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흥사단’을 조직한다. 둘째는 세계에 산재한 동포들을 대한인국민회로 통합하고 조직화해 이들이 각 지역에서 독립된 기관으로 인정받고, 신분 보호를 받으며 국권회복운동에 힘을 모으는 일이다.

도산이 없는 동안 공립협회는 1909년 2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해 ‘국민회’로 발전했고, 1910년 2월에는 대동보국회를 흡수해 ‘대한인국민회’가 됐다. 도산이 돌아온 후 1912년 11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4개의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대표가 모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도산 안창호를 중앙총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날 창립대회에서 결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설립하여 각지의 지방총회를 관리하며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 규모를 중앙총회 지도에 의하여 행사하기로 함. ②중앙총회 헌장을 기초로 하여 규모 일치를 도모함. ③대한인국민회 회표(會標)를 만들어 일반 회원에게 나누어줌. ④대한인국민회 회기(會旗)를 제정하되 지방총회마다 그 모형을 달리하여 각기 지방을 대표하게 함. ⑤중앙총회에 대한 지방총회의 의무금은 매년 200달러로 정함(신용하, 『도산 안창호 평전』).

도산은 이로부터 1919년 3·1운동 후 상하이로 갈 때까지 미국 하와이, 캐나다, 멕시코, 쿠바 등지를 무대로 대한인국민회 사업과 흥사단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필자 박의수 강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재직 시 학생·교무·기획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교육철학학회 회장과 흥사단 중앙수련원 원장 및 교육운동본부 상임대표로 봉사했다.
필자 박의수 강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재직 시 학생·교무·기획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교육철학학회 회장과 흥사단 중앙수련원 원장 및 교육운동본부 상임대표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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