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페르소나
‘폭싹 속았수다’ 애순에 깃든 아이유의 잔상들
작은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만만치 않은 내공
가장 힘든 것은 가난이라 말하는 어여쁜 국민여동생의 눈에서
모진 세상에 홀로 던져진 고달픈 애순의 한숨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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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조건 서울 놈한테 시집갈 거야. 섬 놈한테는 절대. 급기야 노스탤지어도 모르는 놈은 절대! 네버!”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아이유)은 관식(박보검)에게 사정없이 쏘아댄다. 하루하루가 고됐던 제주의 삶.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해녀였던 엄마도 스물아홉에 숨을 거뒀다. 세상천지 돌봐 줄 어른 없이 모진 세상에 던져진 애순의 그때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으니, 그 삶이 얼마나 신산했을까.
하지만 애순 옆에는 유일하게 그녀의 툴툴댐을 묵묵히 들어주고 받아 주는 관식이 있었다. 관식을 향한 애순의 마음도 그만큼 끈끈하다. 섬 놈한테는 절대로 시집 안 가고, 하다못해 ‘노스탤지어’도 모른다고 구박 주면서도 대꾸조차 하지 않는 관식이 신경 쓰인다. “소 죽은 귀신이 씌었나, 뭔 놈의 것이 지껄이지를 않어. 어휴, 차라리 돌하르방을 끼고 살고 말지.”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끼고 산다”는 속엣말이 툭툭 튀어나온다. 관식이 “그럴라면 손 빼. 서울 놈 호주머니에다 넣어”라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툴툴대는 애순의 손은 관식의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다.
촌스럽지만 한없이 풋풋해 보이는 애순과 관식의 이 장면은, 이들의 인생 전체를 담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의 ‘봄날’ 청춘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관식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이 둘은 용왕님도 갈라 놓지 못할 사랑으로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같이 늙어 간다. 그 한평생의 삶이 쓸쓸한 가을과 혹한의 겨울처럼 모질고 모질다. 그 모진 삶에도 봄이 있었고, 여름이 있었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비록 ‘호로록’ 금세 지나가 버리는 봄이었지만.
누가 건드리면 톡톡 쏘아댈 것 같은 요망진 반항아 애순의 모습은 이 인물을 연기하는 아이유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어딘가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장면 장면이, 또 대사 하나하나가 착착 달라붙는다. 앳돼 보이는 얼굴이고, 우리에겐 국민여동생으로 시작해 국민가수로 성장한 그 과정에서 인식돼 온 예쁜 동생 같은 이미지다. 이 험하디험한 제주에서의 삶을 버텨 낸 애순이란 인물과는 막연히 거리가 멀지 않을까 싶지만, 아이유가 툭툭 던져 놓는 연기의 스펙트럼은 어쩐지 애순 그 자체처럼 보인다.
그건 섬 놈한테는 절대 시집 안 간다며 서울 놈을 찾고, 그 풍진 세상 속에서도 ‘노스탤지어’를 이야기하며 문학소녀를 꿈꿨던 애순이라는 인물의 현실 부정이, 화려한 국민가수이자 국민배우가 돼 가는 아이유의 숨겨진 진면목의 한 조각을 꺼내 놓기 때문일 터. 이미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몇 차례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이유는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가난을 겪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할머니 밑에서 자랐던 그녀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가난만큼 힘든 건 없는 것 같습니다. ‘가난은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끼리도 멀어지게 하는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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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이유는 겨우 열다섯 살에 데뷔했다. 그전에도 가수가 되고자 기획사 오디션을 전전했고, 연거푸 떨어지기도 했다. 힘든 형편에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어렵게 기획사에 들어가 데뷔한 뒤에도 곧바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다소 무거운 콘셉트의 ‘미아’라는 데뷔곡이 아이유의 앳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그건 어쩌면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 버린 아이유라는 아이의 내면이 담긴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아이돌 이미지로 변신하면서 아이유의 인기는 차츰 상승했고 ‘잔소리’와 3단 고음으로 알려진 ‘좋은 날’로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되는 가수가 됐다.
그 발랄한 모습 또한 아이유의 면모 중 하나였을 테지만, 가장 싫어하는 게 ‘애교’라고 할 정도로 그게 아이유의 모든 면이 될 순 없었다. 이후 아이유는 아이돌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기 모습을 솔직히 음악에 담아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아티스트의 길을 걸었다. 남다른 작사 능력으로 써클차트 뮤직어워즈에서 올해의 작사가상만 3회 받았던 아이유는 ‘밤편지’ ‘마음’ 같은 곡을 통해 나이는 어리지만 마음속에 담긴 삶의 깊이와 통찰을 보여 줬다. “나를 알아주지 않으셔도 돼요. 찾아오지 않으셔도. 다만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이, 여기 반짝 살아 있어요.” 이런 가사가 담긴 ‘마음’에서 진짜 아이유의 마음이 느껴진다. 누군가 알아 주지 않아도, 작은 불빛이라고 해도 끝내 꺼지지 않고 반짝 살아 있겠다는 여리디여린 소녀 같지만 당차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읽힌다. ‘마음’은 아이유가 콘서트에서 자신의 대표곡으로 남았으면 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애착을 보인 곡이다.
아이유가 아이돌에 머물지 않고 싱어송라이터라는 아티스트의 길로 나아갔던 것처럼, 그녀가 걸어온 배우의 길 역시 그 성장사가 남다르다. ‘드림하이’ ‘프로듀사’ 같은 드라마가 아이돌이었던 그녀가 연기자(배역에서도 아이돌이었다)로 거듭나는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해 준 작품이었다면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같은 사극이나 ‘나의 아저씨’ 같은 그녀의 인생작은 진짜 배우로서 성장을 드라마틱하게 보여 준 작품들이었다. ‘나의 아저씨’에서 다소 어둡고 처절한 이지안이란 역할은 늘 밝고 풋풋하게만 보이던 아이유의 저 깊은 곳에 담긴 그림자를 꺼내 준 면이 있다. ‘나의 아저씨’로 인연을 맺은 김원석 감독과 함께 돌아온 ‘폭싹 속았수다’에선 이제 이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 기쁨과 고통을 자유자재로 숨기고 꺼내 놓는 아이유의 여유가 느껴진다.
지난 10일 ‘봄맞이’라는 부제를 단 ‘가요무대’에선 아이유·박보검이 오프닝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부르는 이색적인 무대가 펼쳐졌다. 교복을 차려입고 나온 두 사람이 차분하게 부르는 노래는 풋풋한 청춘의 생기가 담겼지만 ‘가요무대’라는 공간은 마치 관객으로 앉은 어르신들을 젊었던 그 시절로 되돌려주는 마법 같은 느낌을 줬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 버린 아이가 그 목소리로 힘들게 살아온 모든 분의 어깨를 토닥이는 느낌이랄까. “폭싹 속았수다(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따뜻함이 아이유라는 인물에게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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