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한 세공…속살 드러낸 붉은 알맹이

입력 2025. 03. 10   16:49
업데이트 2025. 03. 1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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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스타를 만나다
솔로 데뷔작 ‘루비’ 발표한 제니

세계적 스타 참여…그래도 주인은 나
당당한 ‘라이크 제니’ 카리스마 폭발 
단단한 외면 아래 연약한 내면까지…
세계 최정상 아티스트가 내놓은 정수

 

사진=OA엔터테인먼트
사진=OA엔터테인먼트



“누가 여기 제니와 놀아볼래? /누가 제니처럼 빠져들게 할 수 있니? /난 제니, 제니, 제니…(Who wanna rock with JENNIE? /Who else got’em obsessed like JENNIE? /It’s JENNIE, JENNIE, JENNIE…).” 63번. 블랙핑크 제니의 솔로 데뷔작 ‘루비(Ruby)’의 타이틀 싱글 ‘라이크 제니(like JENNIE)’에서 제니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횟수다. 제니의 팬이라도, 제니를 모르는 이도 노래를 듣고 나서 제니라는 이름 두 글자는 절대 잊을 수 없다. ‘준비됐어? 장난 아닐 거야’라는 선언과 함께 출발하는 호명의 행진가는 도시에 우뚝 솟은 마천루처럼 드높은 자존감과 패기의 2분4초를 선사한다.

제니를 따라 하고 싶은 이들, 제니를 둘러싼 가십을 소비하는 이들. 그러나 모두 제니가 될 순 없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명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헌정한 우주선에서 자신을 상징하는 ‘J’ 모양 알약을 먹고 각성해 다인원 군무를 펼치는 제니는 노래 가사처럼 인공지능(AI)조차 따라 할 수 없는 고유의 카리스마를 과시한다. 전자음악계 슈퍼스타 프로듀서 디플로(Diplo)가 최근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브라질리언 펑크 장르의 리듬을 날카롭고도 유연하게 휘어지는 탄성의 연검(軟劍)으로 연마한 덕이다.

동시에 ‘라이크 제니’는 개방적이다. “꼭 저를 따라 하거나 제가 되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 노래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재미있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사랑하고 인생을 즐기세요!” 제니를 모방하고 표절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의 태도를 따라 제니처럼 살아가는 일은 근사하다.

‘루비’는 붉은 청사진이다. 앨범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의 유명한 구절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사람은 배우다”로부터 출발했다. 애플 뮤직의 간판 라디오 프로그램 ‘제인 로우 쇼(The Zane Lowe Show)’에서 제니는 첫 솔로 정규앨범을 통해 연극의 막을 올리듯 자신의 새로운 장을 여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고 원하는 대로 만든 작품이라는 자주성을 강조했다. 음악가 정재형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요정재형’에선 1년6개월간의 앨범 제작기간 자신을 깊이 받아들이고 파고드는 과정, 좋아하는 음악가들과의 협업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이 영상에서 정재형은 ‘루비’에 관해 “굉장히 팝적인 작품”을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아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 상징적 노래가 뮤직비디오와 함께 선공개한 ‘젠(ZEN)’이다. 얼마 전 불교TV 채널에서 문광 스님이 이 영상에 사용된 불교적 요소와 역사적 배경을 조목조목 짚어 화제를 모으기도 한 이 노래는 실제로 제니가 고대 신라시대와 불교의 ‘선’ 개념을 탐구해 주체적이고도 굳건한 현대 여성상을 표현한 노래다. ‘세상을 움직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야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는 앨범의 핵심 곡에서 제니는 세상의 중심이 나라고 당당히 외친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자아 주위에는 오늘날 대중음악의 가장 신속하고도 세련된 붉은빛 폭풍이 휘몰아친다. 앞서 언급한 디플로와 더불어 마이크 윌 메이드 잇, 뎀 조인트, 엘 긴초 등 이름난 프로듀서들이 앨범의 세공을 맡았다. 디플로의 발리 펑크와 더불어 그래미상 2관왕이자 NCT 127·엑소·샤이니·엔믹스·에스파 등 유수의 K팝 작품을 제작한 뎀 조인트의 힙합 비트, 2010년대 중후반 전성기를 누렸던 프로듀서 마이크 윌 메이드 잇의 트랩까지 근래 대중음악의 유행을 총망라한다.

참여진은 더욱 놀랍다. ‘엑스트라L(ExtraL)’에서 랩 호각을 다투는 이는 최근 힙합 신의 가장 실력 있는 래퍼로 전성기를 열어젖힌 신인 도치이다. 비욘세의 호쾌한 여성주의 행진곡을 연상케 하는 이 곡에서 ‘우리 여자들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구호와 함께 거친 랩을 쏘아대는 기세는 곡의 주인마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이다. 몽환적인 기타 리프가 주도하는 R&B 곡 ‘핸들바스(Handlebars)’에는 너무도 유명한 팝스타 두아 리파가 제니와 함께 모호한 사랑의 중독을 노래하고 있다. 차일디시 감비노와 칼리 우치스, 도미닉 파이크의 참여도 보석의 왕 루비에 영롱한 빛을 더한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듯 ‘루비’의 주인은 제니다. 다양한 장르와 내로라하는 참여진에도 앨범에서 가장 집중하게 되는 곡은 제니의 이름이 홀로 담겨 있는 곡이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라이크 제니’와 아름다운 여성들만으로 충분하다는 파티 송가 ‘만트라(Mantra)’는 제니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팝스타임을 재차 증명한다.

제니는 그 단단한 외면 아래 갈등하고 괴로워했던 톱스타의 연약한 내면을 앨범 후반부에 차분하게 담았다. 혼란스러운 순간마다 찬물 샤워를 하며 자신을 다잡았던 과거를 기록한 ‘스타라이트(Starlight)’, 멀어진 친구에게 닿을 수 없는 편지를 쓰는 포크 곡 ‘트윈(twin)’의 울림은 깊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K팝 연습생·슈퍼스타의 삶과 평범한 일상을 거치며 스친 수많은 순간, 특별한 감정을 담담히 고백하는 제니에게는 자신과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없이 소중하다. 그가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은 ‘F.T.S.’가 앨범의 영감이 된 셰익스피어의 희극 제목과 함께 공명한다. ‘뜻대로 하세요’다. 

‘루비’를 마지막으로 로제, 지수, 리사로 이어졌던 블랙핑크 멤버들의 홀로서기 첫 챕터가 막을 내렸다. 로제는 글로벌 히트곡 ‘아파트’와 교과서적인 여성 싱어송라이터 팝 문법의 솔로앨범 ‘로지(rosie)’를 내놨고, 지수는 ‘꽃’으로부터 이어지는 캐주얼 팝과 K팝 그룹 블랙핑크의 일원임에 충실한 재미있는 ‘아모르타주(Amortage)’ EP를 발표했다. 새 시대 ‘록스타’를 꿈꿨던 리사는 든든한 태국 팬덤과 함께 댄스 팝 디바로의 ‘얼터 이고(Alter Ego)’를 장착하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제니가 검고 분홍빛의 용 4마리에 진홍빛 루비 눈동자를 박아 넣었다. ‘루비’는 세계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는 K팝 아티스트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솔로 데뷔작이다. 우리는 세계 수준에 이른 K팝 가수가 팝을 따라가는 대신 팝을 선도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주인공은 여성이다.

 

필자 김도헌은 대중음악평론가다. 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이다. 음악채널 제너레이트(ZENERATE)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다.
필자 김도헌은 대중음악평론가다. 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이다. 음악채널 제너레이트(ZENERATE)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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