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딜쿠샤, 20세기 초 ‘경성 속 서양’
‘딜쿠샤’는 힌디어로 ‘기쁜 마음의 집’
1920년대 지어진 독특한 양식 2층집
2017년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 복원
주인 테일러 부부 한국 실상 널리 알려
미서 사망한 남편, 유언 따라 한국 안장
아들이 유고 정리한 책은 한국어 출간
사직터널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이 있다. ‘딜쿠샤’라는 특이한 이름의 집이다. 힌디어로 ‘기쁜 마음의 집’이라는 뜻이다. 영국인 메리 테일러(1889~1982)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 부부가 지어 1924년부터 1942년까지 살았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도원수 권율 장군의 집과 나란히 있다.
이곳은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어 1600년경부터 ‘은행나무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행촌(杏村)동’이라 부른다. 메리는 한양도성길을 산책하다가 이 은행을 발견하고 마음을 뺏겼다. 서양의 저택은 입구에 키 큰 나무들이 있는 풍경이어서 메리가 좋아할 만했겠다고 구보는 짐작한다.
당시 이곳은 한성전기회사 회계사였던 엘리엇(E.A. Elliot) 소유지로 4700여 평 규모였다(『일본의 조선 침략 1895~1910)』). 당시 외국인들이 정동, 종로 등 도심과 가까운 곳에 집을 마련하려다 보니 서대문 바깥을 선호하게 된 것으로 구보는 추측한다. 특히 미국인들은 자본을 앞세워 넓은 대지를 구매해 저택을 지었는데, 행촌동도 그런 조건을 갖춰 낙점을 받았을 터다. 1920년 메리 부부는 엘리엇이 사망하자 이 땅을 매입했다.
영국 연극배우였던 메리는 동양을 순회하며 공연하던 중 일본에서 앨버트를 만났다. 부부는 1917년 6월 15일 공연지인 봄베이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서대문구 충정로의 ‘작은 회색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앨버트와 그의 동생 윌리엄이 미리 서구식으로 개조한 한옥이었다.
앨버트는 부친 조지를 도와 평안북도의 운산금광을 운영하면서 미국 AP와 UPI 통신원으로도 일했다. 테일러 부부는 태평양전쟁으로 미·일 관계가 악화하면서 1942년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45년 광복을 맞자 앨버트는 미군정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체재 경험과 한국어 구사 능력 등을 소개하며 한국 파견을 청원하던 중 1948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유언에 따라 그해 9월 메리는 앨버트의 유해를 운구해 인천항을 거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했다. 1908년에 묻힌 부친 바로 곁이었다. 메리는 34년을 더 살다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쳤다. 그녀가 틈틈이 쓴 유고를 아들 브루스(1919~2015)가 정리해 1992년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로 펴냈고, 한국어판이 2014년 출판되면서 딜쿠샤 이야기가 국내에 널리 소개됐다. ‘호박 목걸이’는 메리의 애장품이었다.
구보가 처음 찾았던 2006년 딜쿠샤에는 10여 가구가 공동주택처럼 살고 있었는데, 겉보기에도 꾀죄죄한 살림새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 집에 대해 “앨버트의 동생이 관리하다 1959년 자유당 조경규 의원에게 매각했으나 4·19 후 조 의원 재산이 국가로 넘어가면서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됐다”고 소개했다.
오랫동안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추정돼 오다 브루스가 방한해 찾아내면서 딜쿠샤의 존재가 드러났다. 2017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받으면서 복원에 들어가 2021년 3월 1일 ‘앨버트 타일러 가옥’으로 개관했다. 브루스의 딸 제니퍼가 선친 유골을 들고 와 딜쿠샤에 뿌리고 메리의 호박 목걸이를 기증했다. 국가유산청은 『호박 목걸이』의 서술을 참고해 소반, 장 등 가구들을 전통 기법으로 제작·배치했다.
복원된 건평 120여 평 딜쿠샤의 내부 모습은 『호박 목걸이』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너비 14m의 1층 거실은 디너 파티, 연회, 무도회 공간으로 사용됐다. 겨울 추위에 대비해 벽난로와 대형 난로를 뒀다. 2층 거실은 담소를 나누기 편하도록 꾸며졌다. 케이크와 샴페인, 치즈와 와인을 즐기고 난롯가에 앉아 포도주스를 마시거나 시가를 피웠다. 태엽 축음기로 음악을 듣기도 했다. 생필품은 외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구매했으나 쇼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테일러는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 1926년쯤 소공동 조선호텔 앞에 수입 잡화점을 내 동생 윌리엄과 조선인 집사에게 운영을 맡겼다.
서양 가구들이 시장에 나오면 주한 서양인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했던 모양이다. 테일러네의 식탁은 1919년 벨기에 영사관이 폐쇄될 때 경매로 사들인 것이었다. 메리는 이곳에서 도보로 사직 언덕을 넘어 정동 중명당에 있던 ‘유니온 클럽’으로 가서 사교활동을 했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주도한 이 클럽에서는 테니스와 당구, 카드 게임, 강연, 독서, 차담 등을 즐길 수 있었다. 테일러 부부는 정동에서 신촌 사이에 살던 외교관, 선교사, 사업가 등과 교유했다.
딜쿠샤는 붉은 벽돌을 두 겹의 격자형으로 쌓아 올려 벽체가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도록 세운 구조다. 독특하고 희귀한 건축 기법이었다. 구보는 개인이 서양식 집을 짓기에는 모든 게 불편했을 1920년대에 어떻게 지었을지가 궁금했다.
『호박 목걸이』를 들여다보니 운송에는 지게와 소달구지를 이용했다. 벽돌은 지게로, 목재는 황소 4마리가 끄는 소달구지로 날랐다. 조선 인부들은 지게로 180㎏을 지고 날라 테일러 부부를 놀라게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당목과 샘이 있는 성역으로 양인이 틈입해 들어오자 크게 반발했다. 그들은 무당을 앞세워 “재앙을 내려달라!”고 주문을 외우며 저주를 퍼부었다.
테일러 부부는 일본 경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공사를 이어갔다. 식수는 마당에 지하수를 파서 사용했다. 한 군데면 됐지만, 샘물을 여분으로 더 팠다. 마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화해의 시도였다. 짓고 보니 기둥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해서 공사 기간이 몇 달이나 더 연장됐다.
그렇게 1924년 딜쿠샤가 인왕산 자락 행촌동 언덕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메리의 오랜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테일러 부부는 신부의 축성을 받았음에도 1926년 벼락을 맞아 집이 불타자 매우 상심했으나 1930년 재건했다.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취재기사를 들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통신망으로 세상에 알렸다. 광무제의 장례식과 제암리 학살사건도 보도했다. 메리는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기차여행을 기록으로 남겼다. 구보는 100여 년 전 한 외국인 부부가 극동에서 집을 짓고 살면서 그 나라를 서술하고, 주권 잃은 국민의 고난을 대변한 사실에서 딜쿠샤의 ‘장소성’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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