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제택 ‘안동별궁’…별궁 터엔 父情만 남았네

입력 2025. 02. 06   15:56
업데이트 2025. 02. 0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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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 그때 그곳
안국역 일대 - 왕가의 저택 '안동별궁'

영응대군 위한 ‘정자 갖춘 집’ 지을 때 
품계 따라 규모 제한했던 법까지 고쳐
병환 들자 이어해 정양하다 임종 맞아
문종은 부왕의 마음 헤아려 빈소 지정
대군 후손 대대로 여러 임금 사랑받아 

안동별궁 옛터. 풍문여고를 거쳐 지금은 서울공예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필자 제공
안동별궁 옛터. 풍문여고를 거쳐 지금은 서울공예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필자 제공



서울 안국역 일대는 조선시대 안국방(安國坊)의 소안동(小安洞)에 속했다. 고종 18년이던 1881년 이곳에 별궁이 들어섰다. 동네 이름을 따서 ‘안국동 별궁’으로 호칭했다. 사람들은 ‘안동별궁’이라고 줄여 불렀다.

정궁인 경복궁과 제2법궁이었던 창덕궁 사이에 있고, 명당으로 여겨져 세종 때부터 동별궁이 자리 잡았다. 첫 주인은 세종의 여덟째 왕자 영응대군 이염이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며 여러 형제를 죽일 때도 임영대군 이구와 영응대군 2명은 살아남았다. 이염은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음률에도 해박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고사에 관한 글들, 세종이 지은 가사 168장을 엮은 『명황계감』을 한글로 번역했다.

세종이 매우 총애한 아들이었다. 내탕고의 진귀한 보물도 모두 이염에게 주고자 했다. 문종이 즉위 후 선왕의 뜻을 헤아려 그 보물들을 아우 이염에게 실어 보냈다. 상의원에 명해 사계절 의복도 만들어 줬다(『국조보감』, 문종 1년). 세종의 이염에 대한 사랑은 만년에 들어 더욱 커져 안국방에 제택(第宅·정자를 갖춘 집)을 지어 줬다. 왕자의 궁터를 확보하기 위해 이미 있던 인가 60여 채를 헐고 지었다. 당시 품계에 따라 가옥 규모를 엄격히 제한하던 법을 어겼을 정도였다.

대군의 경우 택지는 1170평(약 3860㎡), 방은 60칸을 넘길 수 없었다. 세종이 31년에 이 규제를 일부 완화한 바 있었는데, 세간에서는 ‘영응대군의 제택 건축을 염두에 두고 내린 조처’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세종은 전해에 남대문 재건공사를 맡았던 의정부좌참찬 겸 판호조사 정분에게 건축을 일임했다. 구보는 그 대목에서 세종이 이 제택 공사를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를 짐작한다.

제택은 세종 31년 봄 공사를 시작해 11월에 완공했다. 집이 완성된 이듬해 2월 세종은 병환이 들어 이곳으로 이어해 정양에 들어갔다가 10여 일 만에 임종을 맞았다. 세자 문종은 영응대군의 집을 그대로 빈소로 지정했다. 문종은 부왕이 영면에 든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부왕의 영구도 넉 달 후에 발인했다(『세종실록』). 이곳을 각별하게 여겼던 부왕의 심사를 반영한 효심 깊은 조치였다.



안동별궁. 출처=국립중앙박물
안동별궁. 출처=국립중앙박물



그 후로도 이 집은 계속 대군가(大君家)로 남았다. 이 집에서 자란 이염의 딸 억천이 능성 구씨 구수영과 결혼하면서 자리 잡은 곳이 길 건너 인사동 순화궁 터였다. 성종은 자을산군(者乙山君) 시절 후사가 없던 삼촌 예종의 후계로 발탁됐는데, 즉위 직전 이곳에서 한명회의 딸과 친영례(親迎禮·혼례)를 거행했다. 자을산군이 형 월산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데는 ‘실권자 한명회의 사위’라는 조건을 고려한 왕대비 정희왕후와 생모 인수대비의 공통된 판단이 작용했다. 어린 왕의 입지를 안정시켜 주고 싶은 대비들의 마음이었다.

영응대군 사후 부인 송씨가 영응대군의 제택을 ‘연경궁(延慶宮)’으로 고쳐 부르다가 성종 3년 12월에 이르러 호조에 “연경궁을 월산대군에게 사하라”고 전지했다(『성종실록』). 손주뻘인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망부(亡父)이자 세조의 요절한 장남인 의경세자를 기리는 사당 의묘(懿廟)를 세우고 이곳을 나라에 바친 것이다.

구보는 송씨의 정치감각이 뛰어났다고 여긴다. 덕분에 이염과 송씨의 후손들은 후대에도 여러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영조가 이염의 후손 이민곤을 금지옥엽으로 여긴 게 대표적이다(『승정원일기』 17년 4월 10일). 송씨의 결정 이후 연경궁의 주인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됐다. 성종이 망부 의경왕을 ‘덕종(德宗)’으로 추존하면서 의경묘도 영은전으로 개칭하고 경복궁 안으로 옮겨졌다. 연경궁 경내에 사묘가 없어지고 저택만 남게 되면서 월산대군이 경내에 누각을 짓자 성종이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성종은 형의 집인 이곳 연경궁에 여러 차례 찾아와 우의를 다졌다.

성종이 형 월산대군을 얼마나 위했는지는 다음의 일화에서도 짐작된다. “사옹원이 살곶이에서 붕어를 잡아 성종에게 한 대야를 올리자 왕이 연경궁에 두 마리를 보냈다.”(『열성어제』 제5권) 성종 19년에 월산대군이 별세함에 따라 성종의 후년과 연산군 시대를 거쳐 중종 초년까지 월산대군가는 빈집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중종 17년인 1522년 중종이 여섯 옹주 중 첫째인 혜순옹주에게 이 집을 하사했다. 중종은 하사의 변을 남겼다. “오랫동안 공가로 있는데 왕자녀에게 장유차서에 따라 분사해야 무용지가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빈집을 두고 또 짓는다면 그 폐가 적지 않다.”(『중종실록』) 중종은 아들 금원군에게는 양녕대군의 제택을 줬다.

인조 때는 선조의 딸 정명공주가 이 궁을 물려받았다. 정명공주는 그 무렵 헐렸던 인왕산 아래 인경궁의 170칸분 자재를 실어 와 집 규모를 키웠다. 규모도 100칸이 넘었다. 세간의 원성이 컸다. “공주 제택에 대해 광해군 때의 궁전 축조만큼 민원이 높습니다.” 이 간언에 인조가 답했다. “중종의 부마 광천위가 살 때는 300여 칸이었는데, 거기에 비교하면 작은 규모다. 본가에서 스스로 영조하는 일이라 국가에 끼치는 손해도 없다.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인종실록』)

다시 80년의 세월이 흘러 이 집은 숙종의 막내아들 연령군에게 내려졌다. 숙종은 인사동 순화궁과 풍수를 따져 비교하다가 이곳이 더 길지라고 판단했다. ‘강화도령’으로 지내다가 왕위를 이은 철종은 부친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이곳에 뒀다. 연령군의 계보로 옮겨 간 이하응(흥선대원군)이 물려받았다가 철종 때 사묘가 들어서자 건너편 운니동에 운현궁을 지어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은 이곳을 왕실 직속 별궁으로 개조했다. 왕세자 책봉과 가례를 위해서였다. 왕세자 이척(순종)은 이곳에서 1882년 2월 민태호의 딸(순명효황후)과 가례를 올린 데 이어 1904년 황후가 사망하자 1906년 윤씨(순정효황후)와 두 번째 가례를 올렸다.

1910년대에는 상궁들이 기거하다가 1937년 민영휘가 사들여 휘문소학교를 세웠고, 1944년 풍문여학교로 개편됐다. 고종의 5남 의친왕 이강(1877~1955)이 6·25전쟁 후 이곳에서 만년을 보냈다(『서울 6백년』). 2017년 풍문여고가 강남으로 이전한 뒤에는 서울시가 부지를 매입해 서울공예박물관을 지었다. 

별궁의 3동 건물 중 경연당(慶衍堂)과 현광루(懸光樓)는 1985년 해체돼 한양컨트리클럽을 거쳐 충남 부여군의 한국전통문화학교에 이축·복원됐고, 정화당(正和堂)은 서울 우이동 메리츠화재연수원 내에 옮겨졌다. 세종서부터의 유래와 정궁과의 근접성 등이 작용해 안동별궁은 역대 왕들이 모두 집착한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흔적도 없다. 구보는 ‘별궁식당’이라는 한식집에 굳이 들어가 저녁을 주문하며 옛 별궁을 더듬는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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