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 땅에서 청과 일이 싸우는가”... 열여섯 소년은 분해 잠들 수 없었다

입력 2025. 01. 14   16:38
업데이트 2025. 01. 1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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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 안창호의 삶을 바꾼 위대한 각성


정부가 동학 진압 위해 부른 청군
일본군 진입 빌미 되어 전쟁 발발
평양 거리 순식간에 잿더미로…

약육강식 국제 정세 목격한 소년
민족의식 각성하고 ‘소명’ 깨달아
홀로 서울로 가 구세학당에 입학

“이 학생의 활기에 새로운 기관 돼”

교장 밀러 보고서 열정 짐작케 해

 

안창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대동강과 모란봉.
안창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대동강과 모란봉.

 


평범한 농촌 소년 안창호

안창호(安昌浩)는 1878년 대동강 하류에 있는 도롱섬(봉상도)에서 안흥국(安興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7세에 대동강변 ‘국수당’이란 마을로 이사해 8세부터 서당에 다니는 한편 집안일을 도왔다.

그 시대 보통 농가에는 소 한두 마리를 키웠다. 소는 농가의 중요한 일꾼이며 비상시에 팔아 현금화하는 저축 수단이기도 했다. 소를 돌보고 소먹이 풀을 준비하는 일은 대개 초등학교 저학년 나이의 아이들이 담당한다. 창호도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창호가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어머니는 두 아들(둘째는 유아 사망) 교육을 위해 할아버지가 사는 대동군 노남리로 이사했다. 안창호는 엄격한 할아버지 밑에서 후에 장인이 될 이석관(李錫寬)의 서당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한문을 배웠다.

안창호가 14세 때 할아버지는 총명한 손자의 교육을 위해 강서군 동진면으로 이사했다. 그 지역 저명한 유학자 김현진(金鉉鎭)의 문하에서 16세까지 본격적으로 유학을 공부했다. 서당에서 안창호는 세 살 위의 청년 선각자 필대은(畢大殷)을 만나 서구 문물과 국제정세에 관해 안목을 넓히게 됐다.

청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 출처=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청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 출처=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구세학당 교장 밀러.
구세학당 교장 밀러.

 

밀러가 선교본부에 보낸 보고서.
밀러가 선교본부에 보낸 보고서.

 

구세학당의 학생과 교사들. 출처=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구세학당의 학생과 교사들. 출처=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을 길러야 한다!

1894년 삼남 지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국 군대를 불러들였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진입해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7월에 아산만과 성환에서 시작된 청나라와 일본의 전투가 9월에는 평양성에서 대대적인 시가전으로 번졌다. 졸지에 평양 거리는 전쟁터로 변했다. 가옥이 불타고 유서 깊은 고적들이 파괴되는가 하면 시민들은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이런 참상을 본 16세 소년 안창호는 분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왜 청국과 일본이 우리 땅에서 싸운단 말인가?” “왜 우리는 두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창호는 서당 선배 필대은과 밤을 새워 토론했다.

안창호는 드디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외국 군대가 마음대로 들어와 우리 강토를 짓밟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청일전쟁은 평범한 시골 소년 안창호가 약육강식의 국제정세를 깨닫고 민족의식을 각성(覺醒)하며,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독일 철학자 슈프랑거(E. Spranger)는 교육의 본질을 각성이라고 봤다. 안창호에게 슈프랑거가 말한 ‘내면적 세계의 각성’ ‘인격적 자아의 각성’ ‘민족사적 사명의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소년 안창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위대한 각성이다.

소년의 각성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다. “나부터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 안창호는 전쟁이 끝날 무렵 삼촌에게 여비 10원을 얻어 피란지 황해도 곡산에서 곧장 서울로 갔다. 시내 구경도 하고 일자리를 구하려 돌아다니다가 하루는 남대문 근처에서 “우리 학교에 오면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도 시켜준다”고 선전하는 서양인 선교사의 말을 들었다. 처음엔 내키지 않아 며칠을 버텼으나 여비도 떨어져 숙식도 어려운 상황이라 창호는 결국 그 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가 세운 구세학당에 입학했다.

구세학당은 원두우(元杜尤)학당 혹은 밀러학당이라고도 하며 오늘날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안창호는 1894년(16세)부터 약 2년 동안 보통반과 특별반을 이수하면서 산수·세계지리·과학·체조·음악 등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기독교에 입문했다.

그 당시 교장이던 밀러(F. S. Miller) 목사의 보고서를 통해 안창호의 학교생활과 사람됨을 엿볼 수 있다. 보고서에는 “안창호는 자기 위치에서 훌륭한 발전을 보였고, 실제로 학당은 평양에서 온 이 소년의 열정과 활기 덕분에 새로운 기관이 된 것 같았다” “창호는 그를 중심으로 학당의 최고 요소를 모아 평양의 열정과 활기를 다른 소년들에게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는 기록이 있다(『도산안창호전집』).

밀러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도 보인다. 안창호는 새해를 맞아 옷을 세탁하고 수선한다는 이유로 밀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밀러는 나중에 갚으라고 말하면서 3원을 빌려줬다. 여러 주일이 지난 후 새 옷을 입지 않은 안창호를 의아하게 생각한 밀러는 “전에 네게 빌려준 돈을 어디에 썼느냐”고 물었다. 창호는 “그 돈을 벌어서 갚을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이 요구하면 언제든 돌려드릴 수 있도록 내 상자에 보관하고 있습니다”고 답했다. 창호의 대답을 듣고 그를 의심했던 밀러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 판단했는지를 깨닫고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 일화에서 도산의 주도면밀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대책 없이 신용카드를 긁어대고 신용불량자가 되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대책 없이 일부터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실행하는 도산의 업무추진 방식은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후일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도산은 “군사 1만 명을 6개월 먹이려면 식비만 해도 6만 원이 필요한데, 준비 없이 개전(開戰)하면 적에게 죽기 전에 굶어서 죽을 것”이라고 하며, 적어도 전쟁다운 전쟁을 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안창호는 학당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접장(반장 혹은 조교)으로 지명돼 매달 1원의 보수도 받았다. 한편 안창호는 배재학당에서 서재필 박사가 지도하는 토론 모임에 참석, 후일 독립협회에 가입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 무렵 출간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읽고 서구문물에 대한 이해와 동경이 깊어져서 훗날의 도미 유학 동기가 됐다.

동학군에 잡혀갔다가 빠져나온 필대은도 도산을 찾아와 구세학당에서 같이 공부하고 후일 독립협회 활동을 함께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밀러학당에서 새로운 학문으로 무장한 청년 안창호가 스승이자 동지가 된 새로운 인물들과 함께 어떤 활동을 펼쳐나갈 것인지 다음 회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필자 박의수 강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재직 시 학생·교무·기획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교육철학학회 회장과 흥사단 중앙수련원 원장 및 교육운동본부 상임대표로 봉사했다.
필자 박의수 강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재직 시 학생·교무·기획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교육철학학회 회장과 흥사단 중앙수련원 원장 및 교육운동본부 상임대표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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