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을사년을 고대하며

입력 2025. 01. 06   15:42
업데이트 2025. 01. 0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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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민 서울신문 문화체육부장
홍지민 서울신문 문화체육부장

 


‘차도남’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도시 남자다. 그래서일까. 그다지 뱀과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어려서 할아버지·할머니가 계신 시골을 오가기도 하고,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로 진학하며 이따금 산행 기회가 있기는 했으나 뱀과 맞닥뜨린 기억은 희미하다. 잠시 살았던 서울 우이동 산자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대 중반 강원도 화천군에서 보낸 군 시절에야 가까이서 목도하곤 했다. 선임병이 호기롭게 뱀을 집어 들고 땅에 메치던 장면, 불에 구운 뱀고기를 질색하던 후임병에게 들이밀던 장면이 떠오른다.

애초 뱀에 관한 이미지는 썩 좋지 않았다. 전래동화에서 그랬다. 우리 옛이야기를 살펴보면 뱀이 오래 묵으면 구렁이가 되고, 오래 묵은 구렁이는 이무기가 되는 나름의 체계가 있었는데 이미지는 달라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무기의 경우 1000년 정도 고생한 뒤에야 용이 돼 승천한다는데, 지난한 세월을 감내하는 이무기보다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멋진 모습의 용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으나 구약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여 낙원에서 추방당하게 만든 존재가 뱀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슬그머니 얼버무린다는 뜻의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필요 없이 덧붙여 일을 그르친다는 의미의 ‘뱀을 그리고 발까지 단다’(사족)는 속담 역시 뱀의 부정적 이미지를 부채질했다.

뱀에 관한 이미지가 바뀐 것은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다. 첫째는 장모님이 커다란 잉어를 들어 올리는 태몽, 둘째는 예쁘장한 실뱀을 품는 태몽을 꾼 뒤 얻었다. 이때부터 뱀의 긍정적 모습을 눈여겨보려 했던 것 같다. 흔히 꿈에 뱀이 나오면 진취적이며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로운 자손이나 효성 지극한 자식을 낳는다고 한다. 큰 뱀이 나오면 사업이 잘 풀린다는 말도 있다. 한편으로는 뱀이 풍요와 번영, 다산, 지혜를 상징한다는 이야기다. 우리 조상들 사이에서 뱀은 집과 재물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과거 냉혈동물로 잘못 알려진(정확하게는 변온동물이다) 뱀은 시간으로 따지면 오전 9~11시를 가리킨다.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르는 정오 전, 만물이 한창 활동하는 시간이어서 뱀은 양기가 충만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언젠가부터 검은 호랑이의 해, 흰토끼의 해라는 말이 오르내릴 때마다 단순히 상업적 마케팅의 하나로 여겼는데 이 또한 알고 보니 근거가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날짜나 달, 연도를 셀 때 사용한 ‘십간(十干)’에는 각각 색깔이 ‘매칭’돼 있다. 갑(甲)과 을(乙)은 청색, 병(丙)과 정(丁)은 적색, 무(戊)와 기(己)는 황색, 경(庚)과 신(辛)은 백색, 임(壬)과 계(癸)는 흑색이다. 여기에 띠를 결정짓는 ‘십이지(十二支)’인 자(子·쥐), 축(丑·소), 인(寅·호랑이), 묘(卯·토끼), 진(辰·용), 사(巳·뱀), 오(午·말), 미(未·양), 신(申·원숭이), 유(酉·닭), 술(戌·개), 해(亥·돼지)와 결합해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이룬다. 그래서 2024년 갑진년(甲辰年)은 푸른 용의 해, 2025년 을사년(乙巳年)은 푸른 뱀의 해인 것이다.

평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갑진년은 전혀 ‘값지지’ 못했다. 특히 한 해의 마지막에 커다란 어둠과 슬픔이 나라 전체에 내려앉았다. 새해가 밝았지만 새해가 온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당나라 시인이 지었다는 시구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같다. 을사년을 맞았으나 여전히 갑진년에 붙잡혀 있는, 양가적인 느낌이 든다. 마치 우리가 뱀에게 가진 감정과 같다고 할까. 우리 사회가 허물 벗는 뱀처럼 새롭게 출발하고 지혜로운 변혁과 재도약이 이어지는 시점이 어서 빨리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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