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하바롭스크 학생들 태극기 흔들며 한국말로 환영

입력 2025. 01. 03   17:15
업데이트 2025. 01. 0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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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37. 2015년 유라시아친선특급<2> 

시베리아 개척 하바로프 동상 우뚝
2차 세계대전 참전 영웅에 고려인 많아
김유천 등 고려인 이름 딴 거리 있어
헤이룽강 두고 중·러 영유권 분쟁 계속
극단 소리개 공연 관객 하나로 묶어

 

하바롭스크를 포함해 시베리아를 개척한 하바로프의 동상. 네이버 블로그
하바롭스크를 포함해 시베리아를 개척한 하바로프의 동상. 네이버 블로그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2015년 7월 16일. 유라시아친선특급의 두 번째 목적지 하바롭스크역에 도착하자 태극기를 흔들며 러시아 학생들이 한국말로 맞아줬다.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만큼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국에서 우리말 환영은 언제나 반가운 법이다.

시베리아횡단열차(TSR)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 구간은 시베리아 노선 중 가장 먼저 운영에 들어간 구간이다. 구(舊)소련 시절에는 안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선로를 폐쇄해 하바롭스크가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착역 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역을 나서자마자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우람한 동상이 눈에 띄었다. 그는 1650년쯤 이곳을 포함한 시베리아를 개척했다. 하바롭스크란 명칭도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무르강 전경. 중·러 분쟁의 불안이 잔존하고 있다.
아무르강 전경. 중·러 분쟁의 불안이 잔존하고 있다.

 

안내를 맡은 김 나타샤의 집. 3대가 함께 생활해 집이 큰 편이었다.
안내를 맡은 김 나타샤의 집. 3대가 함께 생활해 집이 큰 편이었다.

 

하바롭스크 시장 풍경.
하바롭스크 시장 풍경.

 


하바롭스크는 사실 군사거점으로 도시 규모를 키웠다. 1858년 동시베리아 총독이던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백작이 불과 2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청나라로부터 아무르강에 대한 영유권을 빼앗기 위한 전초기지로 세운 도시가 바로 하바롭스크다. 그 후 중국과 국경분쟁이 쉼 없이 일어나면서 군사도시로 발전했다. 극동군관구사령부도 이곳에 있다. 인구는 60만여 명인데, 고려인이 1만 명 정도를 차지한다.

고려인 역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먼저 ‘영웅광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산화한 3만7000명의 이름이 돌판에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 속에서 ‘김’ ‘리’ ‘박’ 같은 고려인의 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안내를 맡은 교포 김 나타샤 씨가 설명했다. 하지만 광장은 공사 중으로 출입이 제한돼 직접 둘러볼 수는 없었다.

하바롭스크에는 고려인의 이름을 딴 거리도 몇 개 있다. 김유천 거리가 대표적이다. 그는 1900년 연해주 수이펀 구역 차피고우 마을에서 가난한 고려인 2세의 딸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 때 적군에 가담했다가 1929년 백군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듬해 전공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생겼다.

이어 발길을 옮긴 곳은 아무르강이다. 물속에 부식질이 다량 함유돼 물빛이 검푸르죽죽하다. 이런 색의 물줄기가 마치 용처럼 구불구불 흘러 중국 사람들은 ‘헤이룽강(黑龍江)’이라 부른다.

 

 

하바롭스크주립극장의 소리개 공연. 관객을 하나로 이어주는 흥겨운 공연이었다.
하바롭스크주립극장의 소리개 공연. 관객을 하나로 이어주는 흥겨운 공연이었다.

 

 

그러나 이 강은 절대 평화롭지 않다. 강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중국 간 시비가 그칠 날이 없다. 방문했을 즈음에도 강 가운데 있는 두 개의 섬을 놓고 일어난 분쟁이 무력충돌 직전까지 치달았다. 2004년 국경협정에 따라 분쟁이 일시 봉합됐지만, 언제 또다시 터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문득 우리의 비무장지대(DMZ)가 떠올랐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뜻밖의 해프닝도 있었다. 러시아에는 바냐 말고 다른 형태의 사우나가 있다. 사우나, 수영, 식사, 노래 등을 한 장소에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겨울이 길고 추운 러시아 특유의 기후로 인해 생긴 시설이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단체로 모여 친목을 다지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인 이르쿠츠크까지는 열차 타는 시간만 해도 장장 62시간이다. 말 그대로 고난(?)의 구간이다. 당연히 그 시간 동안 목욕은 꿈도 꿀 수 없고, 머리를 감는 것도 제한된다. 그래서 관계자의 안내로 몸을 씻으러 왔는데, 이것이 서울에서는 정부 차원의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퇴폐업소에 갔다고 잘못 알려진 것이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다들 얼마나 어이없어 했는지.

안내를 맡은 러시아 교포 김 나타샤의 집에도 가 볼 기회가 있었다. 자녀와 손자까지 3대가 함께 생활해 집이 큰 편이었다. 러시아 주민과 비교해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들에겐 아픈 과거가 있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18만 명의 고려인이 연해주를 떠나 낯선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쫓겨났다. 잊어서는 안 될 처절한 아픔과 이산의 현장. 그런 슬픔에도 불구하고 이곳 연해주에 남은 사람들이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동포들은 불굴의 의지와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정착에 성공하며 지금의 발전된 모습을 일궈냈다.

하바롭스크에서 마지막 일정은 주립극장에서 열린 극단 ‘소리개’의 공연이 장식했다. 피아노와 드럼, 창, 사물놀이가 어우러진 퓨전 공연은 극장을 찾은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어도 음악을 통한 마음은 하나였다.

그리고 밤 11시, 친선특급단은 기적 소리를 높이며 출발했다. 다음 목적지인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를 향해.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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